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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르멘 May 17. 2024

나에게 반하는 나의 유언장

시간은 피보다 찐하다

<나의 유언장>


"나의 유산 3억을 나의 딸에게 모두 물려준다"


내 딸은 3억을 받았을까?

아니다.

나에겐 남편이 있고, 남동생이 있었다.


3억 중 나의 남편에게 1/2, 나의 딸에게 1/2, 나의 남동생에게 1/3의 비율로 유산이 가게 돼있다.


우리나라에는 '유류분'이라는 상속법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나의 유언장은 나에게 반(反)하게 돼 있다. 



찾아보니 아래 그림과 같다.

이법은 1979년 제정됐다(직계비속은 자식, 직계존속은 부모)


과거에는 농경사회 대가족제로 모두가 집에서 함께 살고, 공동경제권이 있어서 재산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만약 장남 등 특정인에게 유산을 몰아주면(과거에 대다수 그랬음) 다른 가족구성원은 생존권이 위협받기도 했다.


이런 배경하에 '유류분'이 생긴 건데 현대사회와는 맞지 않다.

형제자매가 재산형성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고, 모두가 함께 사는 대가족제도 아니기 때문.


그래서 최근 헌법재판소는 유류분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구하라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평생 얼굴 한번 안 보이던 자식, 또는 자식을 유기하거나 학대하던 부모가 갑자기 재산상속을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하다는 이유다.


상속은 영어로 inherit다.

in+herit의 합성어로 볼 수 있는데

법이나 혈연 안에(in) 있는 이에게 물려주는(herit) 것이다.

물려주는 상속에는 재산, 물건, 신체적 특징 등이 포함된다.


법과 혈연 안에 있는 사람.

배우자, 부모, 자식, 형제, 자매 모두 포함된다.


물리적,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가족의 형태가 물리적, 표면적으로 설명될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정말 내가 피가 필요할 때 그 진한 피를 나눌 이가 얼마나 될까.


바람을 핀 배우자, 정신적 혹은 신체적 학대를 해온 부모, 부모를 버리고 집 나간 자식.

그 군상은 잔인하리만큼 다양하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눈물의 여왕'에서 대기업 회장이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다.

사실혼 관계인 여성에게 대기업 회장의 권한이 모두 넘어간다.

하지만 그 여성은 회장을 식물인간에 빠지게 한 장본인.

회장의 자녀와 손주들은 집에서 쫓겨난다.


누가 봐도 나쁜 인간은 사실혼 관계의 여성이지만, 그 여성의 한마디도 뼈가 있다.


그녀의 한마디를 각색하자면.


"회장님 살아생전, 돈돈돈만 했던 게 누군데?

나야 남이지만, 너네는 피를 나눈 자식이고 형제잖아.

누가 누굴 욕해?"


실제로 그 회장 곁에서 가짜지만 행복한 시간을 함께 만들었던 건 그 여성이었다.

과연 누구와의 시간이 더 진하다 할 수 있을까.


최근 인기였던 영화 선산의 시작도 이렇다.

갑자기 죽은 선산의 주인에게는 1순위, 2순위, 3순위의 상속인이 없었고 그래서 먼 친척뻘의 주인공에게 연락이 간다. 그런데 갑자기 이복형제가 나타나 상속의 권한을 요구한다.

존재 자체도 몰랐던 이에게 피로 연결됐다는 이유로 재산이 일부 넘어가게 돼있다.




피는 시간과 상관없는 걸까?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시간에 영향을 받는다.

그 하나의 진리만큼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 시간을 어떻게 쓸지는 모든 생명체에게 달린 의무이자 권한이다.


상속은 어떨까.

상속이야 말로 시간으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누군가가 죽고, 누군가가 남고.

누군가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룬 시간의 결과를 누군가가 받는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그 시간 속에 있는(in) 사람이 돼야 한다.

그 시간 속에 고인을 괴롭힌 시간의 동반자가 아니라면.


사람이 피로만 이뤄진 생물이 아니고,

시간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라면 그 성장으로 이뤄낸 결과 또한 피뿐 아닌 시간에 따라 나눠야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한 가지 드는 생각은,

살아생전에도 우리 모두가 그 시간을 함께 나눠 쓰는 존재라는 것.

어찌 보면 사후의 시간의 결과를 나누는 일은

결국 생전의 시간을 의미 있게 나누는 일에서 시작되는 걸지도.   


고로 "시간은 피보다 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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