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산 프로젝트> _ 세 번째 이야기
안녕, 아들.
네가 두 발로 걷기까지 몇 번을 넘어졌는지 기억하니?
지금의 너는 두 발로 걷는 것이 숨을 쉬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처음엔 혼자 힘으로 뒤집지도 못했고, 고개를 가눌 수도 없었으며, 기어 다니지도 못했지. 그러던 네가 무려 이천 번의 넘어짐 끝에 이뤄낸 성과가 바로 두 발로 걷게 된 것이다.
믿기니? 너의 두 발로 땅을 걷고 너의 몸이 균형을 잡기까지 이천 번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이천 번의 연습을 거쳐 이뤄낸 너의 직립보행의 균형감각. 그러니 이건 당연한 성과는 아닌 거지.
하지만 두 발로 걷는 균형 감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린 자주 잊곤 해.
발가락에 가시가 박혔을 때, 척추가 다쳤을 때, 한쪽 시력을 잃었을 때 우린 바로 두 발로 걷는 행위를 하지 못하게 되잖아. 바로 균형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런데 이 균형감각은 비단 신체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야. 빠름과 느림, 소극성과 적극성, 혁신과 보수, 공과 사 등.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사회의 수많은 가치들을 판단하고 선택할 때도 이 균형감각을 언제나 사용한단다.
신체의 균형감각은 정신의 균형감각을 대변해 주는 예시지. 우리가 신체의 균형감각을 잃을 때 우리는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잖아. 마찬가지로 우리의식의 균형감각이 없으면 보고 있지만 전부 보지 못하고, 듣고 있지만 오롯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만 정확한 진실은 말하지 못하게 된단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살아가며 균형감각을 잃고 넘어질 때, 어떻게 균형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해.
균형. 그건 엄마가 엄마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이니까.
사전적으로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를 의미해.
무게를 비교하기 위한 저울을 떠올려봐.
저울의 양쪽 접시에 담긴 물건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 않은 상태를 균형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저울에는 반드시 양쪽 접시가 존재해야만 해. 서로 다른 극의 접시들이 있어야만 무게를 잴 수 있지. 그 무게가 균등한지 혹은 어느 쪽으로 더 많이 치우치는지를 알기 위한 게 저울의 기능이기 때문이야. 그러려면 반드시 양쪽 끝에 저울이 달려있어야만 하지.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볼까?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양극을 체험해. 심지어 네가 의식 없이 잠을 자는 순간에도(사실 무의식은 깨어있지만)양극은 너를 들락날락한단다. 왜냐하면 네가 숨을 쉬기 때문이야.
들숨과 날숨. 양극의 대표적 예시지. 네가 숨을 의식하든 하지 못하든 들이마시기 때문에 숨은 내쉬어져. 또 네가 숨을 내쉬기 때문에 다시 숨을 들이마시지.
들숨과 날숨은 양극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결코 대립하지 않지. 오히려 공존해야만 너의 호흡이 완전해지잖아. 그런데 우리는 양극 중 반드시 한쪽을 선택하고 한쪽을 배제시키는 오류를 범한단다. 그건 우리가 ‘양극적인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들 모두는 ‘양극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양극적으로 보인다.
세상이 양극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통로’가 되는 우리의 ‘의식’이 양극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주 1)
어쩌면 우리의 뇌가 그렇게 시스템화되어있는 건지도 몰라.
우리 뇌는 이미 ‘우뇌’와 ‘좌뇌’라는 양극으로 나뉘어 있잖아? 우뇌는 보통 감성, 감각, 전체의 조화를 관장하는 뇌인 반면 좌뇌는 이성, 논리, 구분을 관장하는 영역이라고 알려져 있어.
하지만 이 우뇌와 좌뇌 사이에는 뇌량이 있지. 좌뇌와 우뇌의 신경세포들을 연결하는 가장 큰 신경다발이 바로 ‘뇌량’이야. 좌우의 대뇌반구가 만나는 영역에 존재하는 이 뇌량이 우측뇌가 하는 일을 좌측 뇌가 알게 하지. 그리고 좌우뇌가 각각 담당하고 있는 기능을 통합해. 실제로는 어떤 기능이든 좌우뇌가 완전히 따로 분담한다고 볼 수 없는 이유지.
이 뇌량이 좌뇌와 우뇌의 균형감각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 양극을 이어지게 하기 때문에 전체의 균형을 세울 수 있는 거야. 우리가 모든 물질, 정신의 세계에서 양극을 의식해야만 전체의 균형을 세울 수 있다는 걸 방증해 주는 원리지.
우리가 들숨을 쉬어야 날숨이 쉬어지고, 날숨이 다시 들숨을 불러일으키는 반복을 통해 호흡의 균형이 생기지. 우리가 잠을 자야 잠에서 깨어나고, 깨어나야 다시 잠들 수 있는 신체의 리듬이 생겨나. 어느 한쪽 극이 존재해야만 다른 한쪽도 존재할 수 있잖아. 그걸 이해하는 게 바로 ‘균형’의 첫걸음이 아닐까.
‘평화’를 원한다는 건 ‘전쟁’을 없애버린다는 의미가 아닐지도 몰라. 핵전쟁을 그만둔다고 평화가 보장되었을까? ‘균형’을 원한다는 건 ‘불균형’의 싹을 모조리 잘라버린다고 되는 일이 아닐지도 몰라. 파도 위에서 패들보트나 서핑을 할 때를 떠올려봐. 가만히 서있는다고 균형이 잡아지는 건 아니지. 파도의 끊임없는 불균형을 받아들여야만 균형이 잡아진단다. 그리고 그걸 반복해야 하지. 끊임없이, 파도가 치는한 말이야.
다음 편에는 왜 균형을 잡아야만 하는지, 의식적으로 균형을 잡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게. 그건 아마도 네가 두 다리로 균형을 잡고 걷게 된, 이천 번의 걸음마 연습을 한 것과 비슷할 거야.
“모든 극은 그 반대 극을 계승하는 것을 통해 서로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법칙을 우리는 ‘상보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주 2)
주 1, 2 : 뤼디거 달케 외, ‘몸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