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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아무튼, 조치원 이야기

by 자민


약속시간은 11시였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는 여유 있겠지 싶었는데, 티맵에 조금씩 붉은 정체 구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예정된 시간에 간신히 맞춰 도착했다.


친척 어르신들이 공원에 모여 계셨다. 다행이다. 아직 전부 도착한 건 아니시구나. 매번 꼴찌로 도착하면 면목이 없는데.


“아이들은 같이 안 왔니?”
“네”

“어머, 우리 조카도 흰머리가 나네. 이제 마흔 몇이지? 같이 늙어가는구나야”


환갑이 넘은 막내 고모가 내 옆머리를 보곤 까르르 웃으셨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친척 모임이 있다. 설과 추석 전에 한 번씩,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 기일 때 한 번씩, 마지막으로 형제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 기일 때 한 번. 그러다 보니 몇 달 건너 한 번씩은 자연히 만나 서로 안부를 전하게 된다.


이 모임에서 나는 대개 최연소자다. 흰머리가 슬슬 늘어가지만 여기서는 명함도 못 내민다. 아이들을 데리고 갈 때도 있고, 사촌들이 합류할 때도 있지만 모두 사실 객원멤버다. 다섯이었으나 이제는 넷이 되어버린 남매들이 모여 자신들의 부모와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이기에, 그 아랫 세대인 나는 객원멤버이나 가장 자주 참여하는, 이를테면 그룹 015B에서의 윤종신 같은 역할에 가깝다.


“에고, 이제는 내가 오빠보다 나이를 더 먹었네”


아버지와 일곱 살 터울인 막내 고모는 내 옆에서 혼잣말을 했다.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라서, 돌아가신 후로 만 여덟 해가 지났다. 살아계셨으면 칠순이 넘었을 테다.


참배를 마치고 내려가는데 큰 고모 무릎에 눈이 간다. 몇 해 전 수술하셨다더니 위아래로 큰 흉터가 양쪽에 보인다. 평소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취에서 덜 풀린 것처럼 저릿하단다.


고개를 돌려 둘러보니, 삼촌들과 고모들이 예전 기억 속 할머니, 할아버지 나이와 비슷해졌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건강이 최고라며, 앞으로도 건강 잘 유지하며 만나자고 덕담을 나누는 이분들의 파릇했던 시절이 아직도 생생한데.


“삼촌, 고모, 오늘 점심은 제가 살게요.”
“우리 조카, 무슨 좋은 일 있어? 회사에서 승진이라도 한 거야?”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삼촌 고모들은 고맙다며, 덕분에 갈비 맛있게 잘 먹었다며 떠나려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이거 별건 아닌데, 갖고 가서 애들이랑 먹어라”


큰삼촌이 차 트렁크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복숭아다. 이제는 세종시가 되어버린, 조치원의 상징과 같은 과일. 자세히 보니 큼직하지만 어딘가 약간씩은 무른, 내다 팔기는 애매한 복숭아들이다.

집에 와서 갈비와 맞바꾼 복숭아를 깎아 먹었다. 과육을 한 점 베어 무니 물컹, 여름 향기가 난다.


그 순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복숭아밭.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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