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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밭 기억

아무튼, 조치원 이야기

by 자민

가끔씩 꿈에서나 만나는 장면이 있다.


끼익 하고 청록빛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탁- 탁- 하고 나무 타는 냄새가 난다. 손바닥만 한 마당을 건너 부엌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면 할아버지가 무심한 표정으로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있다. 불쏘시개로 들어가고 있는 건 적갈색 복숭아나무 가지다. 부엌 한 편에는 장작으로 쓸 복숭아나무들이 한 짐 가득 쌓여 있다.


할아버지는 불을 때서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그 물을 큰 갈색 고무다라이에 담아 어린 나를 씻겼다. 대야에서 김이 올라오는데, 처음엔 뜨거울까봐 발만 살짝 담그다가 정작 몸을 담그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둘째 나이쯤이나 되었을까. 아니면 더 어렸을 때였을까. TV로 한창 ‘달려라 하니’를 보던 기억이 있으니 초등학교 저학년쯤이었을 성싶다.




복숭아는 늘 친숙한 과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작은 밭에서 복숭아 농사를 지었고, 할머니는 그 밭에서 나오는 복숭아를 조치원 시장에 내다 팔았다. 자주 접하다 보니 복숭아는 황도와 백도가 있고, 때에 따라 딱딱할 때가 있고 무를 때가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됐다.


집에서 할머니가 깎아 내오는 복숭아는 보통 성한 적이 없었다. 갈색 반점이 있어 처음엔 상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이리저리 치여 멍이 든 복숭아들이었다. 시장에서 팔기에는 하자가 있지만, 물기가 많고 달아서 집에서 먹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그럼에도, 할머니는 맨날 썩은 것만 준다고 툴툴댔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방학만 되면 할아버지 손을 잡고 조치원에 갔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왜 그래야 하지?라는 생각도 못했다. 부모가 된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맞벌이하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방학 때만이라도 육아 부담을 덜고 싶었을 거였다. 그때는 쉬는 날도 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주 6~7일 일하던 시절이었으니.


할아버지는 손자를 데리고 복숭아밭에 갔다. 아침을 먹고 나면 산책하듯 길을 나섰다. 할아버지가 모는 자전거 앞에 설치한 보조의자에 앉아 한참을 가면 밭이 나왔다. 할아버지가 복숭아밭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나무 그늘 아래서 벌레도 잡고, 그림자놀이도 하면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벌레랑 노는 것도 무료해질 무렵이면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과도로 방금 딴 복숭아를 쓱쓱 베어 입에 쑥 넣어주신다. 할머니는 맨날 썩어서 물렁한 복숭아만 주는데… 새 복숭아는 조금 단단하고 시큼했지만, 그만큼 맛났다. 그렇게 할머니는 모를, 할아버지와만의 비밀이 하나 생겨갔다.


겨울에도 복숭아밭에 갈 때가 가끔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우고 휘파람을 불며 밭에 나갔다. 복숭아는 겨울에 없는데 왜 가지? 이런 생각은 당연히 했을 리가 없고, 그냥 어른이 가면 같이 가는 거다. 집에는 아무도 없으니까. (밭에 일하러 가는데 아이를 집에 혼자 오래 둘 수는 없었을 거다.)


할아버지는 밭에서 복숭아나무 가지치기를 했고, 나는 할아버지 옆에서 떨어진 가지를 같이 주웠다. 이 붉은 나뭇가지들은 부엌 한 편에 있는 창고에 한동안 쌓였다가, 아궁이 땔감이 되어줄 것이었다. 우리 가족 밥을 짓고, 음식을 하고, 목욕물을 데우는데 쓰일 것이었다.



복숭아밭은 나중에 큰 도로가 나면서 수용되었다. 할아버지는 수십 년간 해오던 복숭아 농사를 접었다. 아끼던 우리 집 복숭아나무들도 모두 다 사라졌다. 그 이후 복숭아밭에 다시 발을 들일 일은 없었다.


그래도, 복숭아밭을 보기만 하면 가족들은 묘한 감정이 다시 드는 모양이다. 최근 가족 모임에서 사진작가인 숙부를 향해 큰고모가 나지막이 말했다.


“예전에 네가 찍은 복숭아밭 사진 있잖아. 그 사진만 보면 나는 그렇게 아부지가 생각난다. 복숭아꽃 사이 저기 어딘가 아부지가 일하고 있을 것 같아서, 아닌 것 알면서도 자꾸 사진 속을 꼼꼼히 들여다보게 돼.”


가끔 녹음 우거진 숲을 거닐다 보면 그 순간이 떠오른다. 복숭아나무 밑에서 벌레 잡으며 할아버지 일 끝나길 기다리던 시간.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 풀밭 아래에서 사마귀와 여치를 잡아 싸움 붙이던, 휴대폰 따위는 본 적도 볼 일도 없고, 풀벌레 소리만 온종일 들으며 한없이 나른해지던 그 시간이.


그 시간이 어쩌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가장 평온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정작 그때는 몰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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