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를 그리워하다.
어쩌면 베니스와는 그런 운명
평범하기 그지없던 대학시절
땀을 뻘뻘 흘리며 족구를 하던 예비역인 나에게 친구 녀석이 다가와 말했다.
"오늘 강의는 사업설명회로 대체한다는데?"
뭐가 되었든 상관없다. 그냥 그저 그렇게 흘러가던 시절이었고 하고 싶은 것도 싫은 것도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땀을 닦으며 들어선 강의실에는 처음 보는 학생들과 그들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하는 한 사업가가 있었다.
설명회 내용이 어찌 되었든 결론은 그 날 사업설명회를 계기로 지금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총 10명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선발 조건은 딱 한 가지 '열정' 만 보겠습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스펙 따윈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성적과 영어회화, 토익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선발한 10명의 인원을 유럽 각 도시에 배치한단다.
심지어 하는 일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여행사를 통해 오는 고객을 픽업만 하는 일이다.
많은 재학생들이 대단한 스펙을 가지고 덤벼 들었다.
100% 면접이 가지는 이점을 잘 활용했는지 얼토당토않게 내가 덜컥 붙어버렸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생애 첫 여행에 대한 설렘을 느낀 순간이었다.
인생의 기회를 몰아서 써버렸는지 10명 중 1명만 뽑겠다는 '인솔자'도 내가 돼버렸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었다.
단지 사람 좋아하는 것 밖에 없던 내가 쟁쟁한 실력자들을 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런던, 파리, 로마가 인기 도시입니다.
선발된 10명의 학생들과 각자 가고 싶은 도시를 정하기로 했다.
단연 인기 있는 곳은 런던, 파리, 로마였다. 이유는 볼 것도 많고 할 것도 많은 대도시라는 이유이다.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세계적인 도시니까 2개월 간의 체류기간 동안 재미있을 것 같아 보였다.
학생들 대부분이 저 세 곳의 도시로 눈을 돌리고 있을 때 나는 다른 곳을 염두에 두었다.
바로 베니스!
이유는 딱 한 가지. 바로 바다였다.
그냥 한 평생 바다 근처에서 자라온 탓인지 바닷가 근처가 마음이 편했다.
운이 좋아 선발되었고, 더욱 운이 좋아 인솔자로 지목이 되었으니
내가 머물 곳은 운이 아닌 선택을 하고 싶었다.
회사에 선배 인솔자들이 이야기했다.
베니스에서 2개월간 있다 보면 너무 심심하다고, 할 게 없어서 광장에서 바다만 바라볼 것이라고.
그 광경을 떠올려보니 더욱더 가고 싶어 졌다. 사람 구경하는 일과가 너무도 해보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내 인생 최고의 2개월을 맞이 할 준비를 마치고 첫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골목길의 끝에 갑자기 바다가 나와도 놀라지 말라
베니스 본 섬은 철저히 두 다리를 의지 하게 만드는 곳이다.
물론 대운하를 통해 버스 역할을 하는 수상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가격도 비싸고 불편한 부분이 있다.
'바퀴 달린 것이라고는 유모차와 캐리어뿐'이라는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다.
베니스의 첫인상은 놀라웠다.
중앙역인 산타루치아 기차역을 나서는 순간, 태어나 처음 보는 건물들과 풍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멍청하게 서서 입은 반쯤 벌린 채 하늘 한번 오른쪽 건물 한번, 왼쪽에 지나가는 배 한 번을 보면서
도시에 가면 '눈 뜨고 코베 인다! 코를 꼭 손으로 잡고 다녀라'며 시골 사람들을 놀려대는 말이 생각났다.
지도를 봐도 무용지물이라는 베니스의 복잡한 골목을 헤치고 2개월 간 머물 숙소로 향했다.
서너 번 골목 끝에 나와야 하는 교차로 대신 바다가 튀어나와 식은땀을 흘렸지만,
그 또한 즐거웠다. 급할 게 없는 나의 2개월이라는 시간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반쯤 땀으로 젖어 도착한 허름한 숙소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지냈나 싶을 정도로 열악했다.
하지만 해지는 시간에 맞춰 책 한 권과 맥주 한 병을 쥐고 나가 앉아있던 흔들의자를 떠올리면
또다시 그런 여유의 시간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새 동네의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과 친분이 생겼다. 눈인사를 나누고 잘 되지 않는 영어와 주워들은
이탈리아어를 섞어가며 잠깐의 현지인 놀이도 했다.
안타깝게도 베니스 본 섬에는 (보통 여행자들이 베니스라고 아는 곳이 본 섬) 젊은이들이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단다. 온통 관광지이다 보니 불편한 것도 있고, 사실 집값도 무지 비싼 편이다.
있을 거 다 있고 교통 편리한 근처 (메스트레 지역)로 다 나가버리고 없단다.
여행 중에 만나는 젊은 친구들은 모두 베니스로 출근을 하는 것이라며 동네 노인들은 광장에 앉아
푸념을 늘어놓았다.
베니스 다운 생활의 연속
꽤 익숙해진 베니스에서 단골가게가 생겼다. 배고프고 가난한 대학생을 만족시켜줄 피자 가게
'pizza al voro'. 거의 매일을 출석 도장을 찍듯 갔다.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친구와 친해져 걷다가 마주치면 인사도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피자가게는 산타 마르게리타 광장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관광객들은 거의 지나갈 일이 없어
동양인은 드물었다. 학교가 위치하기도 해 식사 시간이면 많은 이들이 몰려 북적북적한 분위기도
연출되고는 했다.
사실 혼자 여행을 하거나 홀로 타지에서 지낼 때 가장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이 시끌벅적함이
있는 공간에서 이다. 역시 이 곳 광장에서 베네치안들이 삼삼오오 모여 펍이나 비노테카에서
서서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그 모습에 자주 뭉클하곤 했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 친구들이 미치도록 생각나는 순간들이다.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단연 산 마르코 광장 종탑 위였다.
입장료가 꽤 비싸서 (그 당시 나에겐) 큰 맘먹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긴 하지만, 한번 올라가면
꽤 오래도록 머물다 내려왔다.
처음은 내려다 보이는 천년의 도시 베니스에 빠져 오래 머물렀고, 나중에는 답답한 마음이 들면
종일 불어오는 바람을 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위에서 머물다 광장으로 내려와 플로리안 카페 옆 계단에 앉아 책 한 권을 읽으며
하루를 보냈다. 책 속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베니스와 지금 내가 두 발로 딛고 있는 베니스가
같은 도시라는 것이 놀라웠고, 지금의 모습을 있게 하는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베니스의 중앙에서 역사를 이야기하다
관광의 중심지로 거듭나 있는 베니스도 한때는 잘 나가던 도시국가였다.
소위 잘 나가는 도시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 베니스의 조상들은 피나는 노력을 했다.
외부의 적을 피해 아무것도 없던 늪지에 지어진 도시는 마땅한 일거리도 돈벌이도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배를 만들었고, 섬안에 사람들끼리 물건으로 교류를 했다.
어쩌면 생계형 일거리들이 베니스를 강력한 도시국가로 성장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점점 더 좋은 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게 되고, 배를 만드는 전문적인 공간도 생겨나고
물건을 교류하는 장소가 점점 더 멀리 다양한 나라로 늘어났다.
조선업과 무역업. 이 두 가지가 그 옛날 조그마한 해양도시 베니스를 강대국으로 만들게 한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 발달된 조선업 덕에 영국, 프랑스 할 것 없이 베니스의 배를 빌리거나 사갔고,
생겨난 수입으로 무역업을 하기 위한 해양 고속도로를 만들어 나갔다.
해적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바다 곳곳에 경유지 섬을 만들어 그렇게 그들은 성장해 나갔다.
강대국 반열에 오른 베니스는 유럽 전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약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수호성인의 존재였다.
지금의 이탈리아 주요 국가들은 도시를 대표하는 수호성인이 존재하는데, 베니스의 수호성인은
잘 알려지지 않은 무명에 가까운 수호성인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베니스의 상인 2명이 이집트로 무역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4대 복음 성인 '산 마르코(마가)'의 유해가 위험에 처해진 것을 본다.
유해 보관소 담당자를 끈질기게 회유한 끝에 그 유해를 돼지고기 수레 밑에 숨겨 그곳을 빠져나와
베니스로 가져오게 된다. 그 덕에 지금의 '산 마르코 광장과 산 마르코 성당'이 생긴다.
심지어 수호성인에 맞춰 국기도 바뀌게 된다. '산마르코'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가 그 상징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니스 영화제'의 트로피가 날개 달린 황금사자라는 점을 떠올리면
베니스의 상징이 '산 마르코' 였다는 것이 이해가 갈 것이다.
불행히도 유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해 강대국 베니스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그 어느 도시보다 사랑받는 관광지가 되어있다.
축제의 한 켠에는 씁쓸함이
베니스에서는 매년 2월에 세계적인 축제 '까르네 발레' 가 열린다.
가면을 쓰고 의상을 챙겨 입고 광장과 거리에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이 넘쳐난다.
베니스를 가 본 이라면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상점 곳곳에 기념품처럼 파는 저 가면.
딱히 쓸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너무 이뻐서 하나쯤 사가기도 한다.
바로 이 축제 때문에 생겨난 가면인데, 축제의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가장 근거 있는 이야기로는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베니스가 인구를 늘릴 목적으로
특정 기간 동안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게 축제를 열어 줬다는 이야기다.
귀족과 평민 상관없이 축제 기간 동안 신분을 숨긴 채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인구가 늘어나긴 했지만, 부작용도 함께 나타났다.
느닷없이 생겨난 아이는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저기 버려지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수도원이나 종교 시설은 아이들로 넘쳐 났다.
이런 아이들을 직접 데려다 키워 음악을 알려주고 보살핀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 가 되겠다.
그는 죽기 전까지 매우 유사한 느낌의 음악을 많이 작곡했는데, 그 때문에 창작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한다. 아마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한 생계형 작곡이 아니 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직 나는 베니스가 그립다.
그립다. 등 따시고 배부르지만 배고프던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
가진 것도 없이 피자 한판으로 두 끼를 이어 나갔지만, 발길 닿는 곳곳이 역사의 흔적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생애 첫 여행이자 첫 타향 살이었던 그곳은 내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동양인은 왜 수염이 없냐?'며 물었던 피자집 알바덕에 지금 까지 수염을 기르고 있고,
온 동네방네를 걸어 다니며 만난 많은 현지인들 덕에 외국인 울렁증도 없다.
물론 가장 큰 의미는 나의 평생 직업이 그때부터 정해 졌다는 것이다.
그 뒤로 수없이 (정말 셀 수 없다) 많이 베니스를 가곤 한다.
여전히 피자집은 존재하고, 광장에는 할머니도 나와 계신다. 종탑은 가격이 올랐지만 이젠 서슴없이 갈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립다.
어쩌면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그때의 베니스가 아니라,
그때의 '나' 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