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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Jul 20. 2023

너 한 번 잘 걸렸다.

진상력에 대처하는 마음

따르릉. 부서 전화가 울린다. 누가 받아도 되는 공통 전화를 부지런한 마음을 내어 받는다. 여보세요. 상대방은 너 한 번 잘 걸렸다. 내가 오늘 모든 분노를 너에게 쏟아부어주겠다,라는 마음으로 바로 진상의 얼굴이 되어 힘을 발휘한다.   

  

민원 부서로 온 지 6개월이 지나간다. 그동안 수많은 전화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받아왔으며 기록을 좋아하는 습성을 업무에도 적용해서 전화기 앞에 수첩을 펼쳐두고 전화받은 시각, 발신자, 용건, 대응 내용을 적어왔다. 보통은 검정색 펜으로 적지만 진상들과 통화했던 내용은 특별히 빨간펜으로 코멘트를 남겨두곤 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원하는 걸 빙빙 에둘러서 말하다가 자기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자 갑자기 화를 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 함. 이런 식으로 진상들의 증상과 내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써나가고 있다.      


또 전화기의 기능을 이용해서 나를 지키는 방법도 있다. 발신번호가 벨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뜨는데 그 통화가 진상으로부터 온 것이었다면 전화가 끝나고 바로 저장 기능을 이용한다. 그 사람의 회사명 옆에 알파벳 J를 붙여서. 어느 회사의 진상인지, 다음번에 전화가 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일부러 더 냉정하고 냉철하게 전화를 받는다. 최대한 핵심적인 대답만 사무적으로 짧게 답하고 빠진다. 그게 나를 살리는 방법이다.    

  

간혹 전화를 받자마자 막무가내로 화를 쏟아내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땐 그 업무가 나의 담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빠르게 말하고 관련부서로 전화를 넘겨야 한다. 그저 듣고 있다 보면 내가 감정의 쓰레기 통이 되어서 어느새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물론 몸까지 아파진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선 이제 진상이 슬슬 그 효력을 발휘할 것 같은 순간을 캐치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게 되었다. 이런 건 평생 모르고 살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럭저럭 글로 쓸 수 있는 이야기감은 되겠다만 마음은 매일 찢어진 창호지같이 풀어헤쳐져서 퇴근하게 된다. 그런 날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상습 악질 진상 민원인이 내뿜는 분노 게이지가 얼마나 높은지 전혀 모르고 민원부서로 왔다. 뭐, 나는 원래 친절한 편이니까. 목소리도 상냥한 편이고 성격도 다분히 수용적인 편이니까 전화 응대쯤은 문제없겠지라고 했던 그 생각 자체가 오만했다는 걸 업무를 하면 할수록 깨닫는다. 여긴 친절한 사람이 오면 안 되는 곳이었어, 무뚝뚝하거나 같이 화를 낼 수 있을법한 냉담한 사람이 와서 막말을 아예 원천 차단해야 하는 곳이었구나 싶어서 마음이 얼마나 씁쓸한 지 모른다.      


이런 생각을 가진채 최대한 마음을 싣지 말고 감정 노동자로 일하지 말자, 고객 응대 근로자이지만 내 마음을 지키면서 일해보자, 분명 다짐했는데도 불구하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따르릉.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먼저 소속을 밝히는 상대방. 그래 괜찮은 시작이야,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자신이 이미 같은 내용으로 다섯 명과 통화를 했고 그때마다 부서를 빙빙 돌리는 통에 당신이('나'를 일컫는 말) 자신의 고충을 좀 들어줘야만 한다고 경고를 하고 시작한다.      


대번에 눈치챘다. 진상이다! 최대한 빠르게 담당자에게 안내하겠다 이야기하고 바로 전화를 돌리겠다고 했다. 나의 동료가 같은 건으로 전화통화하는 내용을 이미 들었기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러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상대방은 내 목소리를 듣고는 그저 '네가 내 말을 들어줘야만 해!'라고 판단한 듯 전화를 넘기지 말라는 요구를 했다. 나는 넘기겠다고 했고 그는 또다시 자기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고 했다.      


각자 담당하는 업무가 나누어져 있음을 설명하고, 즉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넘겼다. 이때부터 2차로 속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에겐 '드릉 드릉' 시동을 걸듯 진상력을 발휘하던 상대방이 남자 연장자인 선배와 통화를 하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알겠다'는 유순한 대답을 하며 별 퉁명스러운 언어를 쓰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는 것이다. 아! 내가 그렇게 만만하고 우스웠나? 천천히 말하는 내 말투, 또박또박 친절하려고 노력하려는 이놈의 말투가 문제인가!      


그러자 알 수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괴로운 감정이 밀려왔다. 앞자리에 앉은 선배에게 물었다. 제가 전화 응대 하면서 뭐 책잡힐만하게 말한 거라도 있나요?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아니라고 했다. 여자라서 그렇다는 답이 돌아왔다. 여자라서... 그것도 친절한 여자라서.      


사무실에서 눈물이 터졌다. 억울하고 속상했다. 일어서서 이야기하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온다. 티슈로 눈을 꼭 눌렀다. 티슈가 젖는다. 눈을 감은 자국만큼. 아침에 바른 화장품이 휴지에 묻어 나온다. 지긋지긋하다. 이 회사생활. 사람 가려가면서 진상력을 내뿜는 민원인들. 바뀌지 않을 내 말투. 꾸준히 상처받을 내 마음까지. 벗어나고 싶다. 벗어나고 싶어.      


종종 이런 전화를 받고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두드리는 나에게 선배는 산책을 좀 하고 오라고 권한다. 그렇게 사무실 슬리퍼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고 밖으로 나온 내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길을 걸으면서 눈물이 뚝뚝 흐른다. 얼굴이 번들번들해진다. 나를 쳐다보는 행인들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물이 멈출 줄을 모르고 멈추는 방법도 모른다.      


겨우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쳐내며 걸음을 이어간다. 그러다 공중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수를 한다. 코를 풀고 흐르는 눈물을 수돗물로 덮는다. 소용없다. 세수를 마쳐도 벌건 눈에서 물이 흐른다. 벤치에 앉아서 감정을 추슬러본다. 잘 되지 않지만 최대한 좋은 생각, 좋은 기억을 떠올려본다. 나에게도 잘하는 게 있어. 이 목소리도 장점이 많아. 그 사람이 잘못한 거야. 무례한 사람이야. 화살을 절대로 나에게 돌리진 말자. 상처받은 마음 내가 어루만져줄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마음을 달랜다.      


벌게졌던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며 건물 천장을 바라보고, 창밖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분주함을 바라본다. 내 감정이 타들어가는지,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어가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제 갈 길을 바삐 간다. 나도 누군가에겐 그처럼 상관없는 타인이겠지 생각하며 내 안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마음을 그저 조심스레 달래 본다.      


마음이 좀 가라앉고 나면 전화를 건 악성 민원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서 이번엔 내 쪽에서 억울한 마음을 막 쏟아내는 상상을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영화 시나리오처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그때 이렇게 나 자신을 옹호했어야 한다며 혼자 상상 속 연기자가 되어본다.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가시진 않는다. 이상하게도 그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다 보면 억울함이 배가 되어버린다. 이런건 안 하니만 못한 일일까.   

   

전화를 받다가 예민한 촉이 올 때가 있다. 이 사람 목소리 변하고 있어. 숨소리 한 번, 잠시 쉬는 템포 한 번 다음에 이어서 목소리 볼륨이 갑자기 커지는 어떤 지점이 온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전화 응대 속에서 몸이 타들어간다. 이 일을 언제까지 더 해야 할까. 이 부서에 언제까지 더 있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차라리 멍청이가 되어서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삐뚤어지고 싶다는 마음마저 든다. 벗어나고 싶다. 악성 민원인, 악질 고객으로부터.      


그런 것에 시달리지 않는, 우아하고 평온한 일을 하고 싶다. 과연 그런 일만 곱게 하는 직업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남의 마음에 상처 입힌 사람, 남의 감정에 시커먼 재를 뿌린 사람. 그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죗값을 치르는 날이 올까? 아무리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의 사람이라도 남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권리는 없다. 낮에 있었던 일로 밤까지 눈물을 흘리는 감정 노동자, 고객 응대 근로자가 있다는 걸 우리 모두 기억하면 좋겠다. 얼굴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해를 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많이 아팠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내가 나를 충분히 지켜주지 못해서 그저 마음 아픈 밤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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