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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올렛 May 07. 2024

100% 실크스카프

내 목에 실크스카프가 둘러지기까지의 과정

2~3만원짜리 국내쇼핑몰에서도 질 좋은 옷을 사서 세련되게 매치하는 법을 알려주는 패션 유튜브를 찾았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반가웠다. 옷 보는 눈이 까막눈에 가까워 의생활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우선 옷을 어디에서 사야하는 지가 늘 고민스러웠다. 엄밀히 말하자면, 옷가게 점원과의 대화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러니 어느 옷가게에 가야 옷을 사서 나오기까지 불편하지 않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옷 잘 입는 일의 첫 번째 장벽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기껏 옷가게에 들어가서 비싸게 주고 사온 옷을 집에 와서 입어보면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고 후회스러웠던 적이 많았다. 그 옷을 추천해준 점원과의 대화가 어색했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를 또박또박 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했다. 오래도록 고치지 못하는 악습이었다.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했기에 최대한 인터넷 쇼핑과 그나마 실패 확률이 낮은 옷가게를 정해놓고 연명하듯 의생활을 이어왔었다. 


그런 내게 "언니, 내가 알려줄게. 나만 따라와!" 하면서 자신감있게 오피스룩 코디를 하나하나 일러주는 영상이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몇 개의 영상을 따박따박 시청해 나가다보니 차츰 명품의 세계의 문이 열렸다. 평소에 전혀, 일말의 관심도 없던 명품 가방, 스카프 영상들이 추천되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추천 영상을 무심코 눌렀다가 나는 스카프의 화려한 세계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스카프는 총 3개이다. 스파 브랜드에서 산 하늘색 면 주름 스카프, 인터넷 쇼핑몰에서 산 쁘띠 스카프 두 개(아마도 폴리에스터 100%일 것이다.). 겨울 목도리는 선물로 받은, 조금 촌스러운 무늬의 캐시미어 100% 목도리와 내가 당당히 백화점 1층 목도리 코너에서 구입한 캐시미어가 섞인 울 목도리, 이렇게 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만 D사의 스카프를 영상에서 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되었다. 코디영상을 보니, 내가 가진 트렌치 코트와도 얼추 잘 어울리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 길로 공식홈페이지에 도착해버렸다. 메인 화면에서 여성-여성소품-스카프를 차례로 클릭해서 화면 가득 펼쳐진 스카프를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한 눈에 봐도 내 목에 잘 어울리겠다 싶은 것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100% 실크 스카프, 가격 70만원.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육개장 사발면 700그릇이라면서, 엄마 그거 사면 돈낭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도 700 그릇의 컵라면이 머리 위로 둥둥 떠다녔지만 이내 곱게 스카프를 하고 한층 더 세련되어져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느라 컵라면은 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하룻 밤, 이틀 밤을 고민하다가 다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결제를 했다. 소비자의 마음이 바뀔 틈을 주지 않게끔 간편 결제 시스템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카드 결제와 동시에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카카오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가 그 브랜드의 VIP라도 된냥 잠깐 가슴이 부풀었다. 


하지만 곧바로 취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무 비싸. 그 돈이면 질 좋은 옷 여러 개를 사고도 남을 돈이다. 보고 싶은 책들을 사들일 수도 있고, 여행도 갈 수 있겠다. 여러 대체제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상품 준비 중이라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계속 스카프를 맨 상상 속 내 모습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시소처럼 기울어 '취소해야 할 것 같아' 쪽으로 갔을 때쯤,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메시지가 왔고, 아이들과 축구와 야구를 하다가 상품이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엄마 얼른 집에 좀 갔다 올게" 하며 헐레벌떡 집에 가봤더니 은은한 향기와 함께 택배상자가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손을 씻고 떨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뜯었다. 겉 껍질을 벗기고, 하얗게 드러난 속 상자를 열자, 습자지가 나왔고, 스티커를 뜯어내자 드디어 스카프를 만날 수 있었다. 홈페이지에서 보던 것을 손으로 만지고 내 눈으로 직접 보자 기쁘고 신기한 마음은 배가 되었다. 와, 이렇게 생긴 거구나. 그동안 만져본 적 없던 100% 실크 스카프. 


조심스럽게 꺼내서 미리 봐둔 스카프 매는 법 영상대로 이리저리 묶어봤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영락없는 대여섯 살 또래의 어린아이 모습이었을 것이다. 머리 끝까지 신이 난 모습, 갖고 싶었던 걸 손에 넣은 사람의 모습. 




육아휴직 중에 나의 수입은 0원이었다. 회사 일 말고 다른 것을 해서 돈을 벌긴 했지만, 가지고 있는 소신이 있어서 전액 기부를 했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집은 좁았고, 살림은 단촐했으며, 부피를 차지하는 짐은 자연스레 처분하게 되었다. 그래도 강의할 일이 있을 땐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겉은 번지르르하게 꾸미고 다녔으나, 사실 집으로 돌아오면 소박한 모습으로 허물 벗듯 돌아와서 다시 살림을 했었다. 


복직한 지 2년이 되어간다. 저축액이 올라갔고, 넓은 집으로 이사왔다. 새로 사야 할 가전이 많아서 두어 달은 돈을 물 쓰듯 썼다. 씀씀이가 커져버리니 스카프 한 장으로 고민하는 것조차 궁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휴, 언제까지 살 지 말 지 고민하면서 살래? 그냥 사. 질러. 하는 마음이 결국 승리를 한 것이다. 


어린이날 연휴를 마치고 팀 회의가 있는 날 새로 산 100% 실크 스카프를 하고 갔다. 아무도 스카프에 대해 언급하는 이는 없었으나 내 마음속 한 켠에는 '저 오늘 100% 실크 스카프 하고 왔어요.' 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나중에 명품 가방을 사도 이럴까? 명품 옷을 사도 이럴까? 아마 안 살 것 같다. 나의 허영템은 이 스카프 한 장으로 족할 것 같다. 


면 스카프도, 폴리 스카프도 내겐 충분했다. 하다못해 손수건을 급한대로 매는 것만으로도 목은 따뜻해졌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 말고, 보여지지 않는 것에 더 열중하고 싶다. 만인이 볼 수 있는 글을 쓰느라 1000일 가량을 보낸 적이 있다. 나의 속껍데기를 뒤집어서 훤히 보여주는 일은 나를 성장시키기도 했지만, 내면에 비밀공간 하나 없이 벌거벗은 느낌이 들게 만들기도 했다. 요즘은 시간의 부족이라는 핑계를 대며 글쓰기를 소홀히 하고 있지만 대신 하루 하루를 무척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회사 생활에 적응해나가는 자신을 칭찬해주고 있고,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는 아이들이 주는 선한 작용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요양원에서 안정을 찾아가시는 어머님, 그 역시 자신의 무게를 짊어지며 가정의 한 기둥을 굳건히 받쳐내는 남편과 함께 나는 가족을 우선으로 하며 잘 살고 있다. 


앞으로 몇 년, 조금 더 이어갈 나의 직장생활에 이 스카프 한 장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오늘 회사에서 들은 기분좋은 소식같이 희망과 긍정을 몰고 올 것인가? 늘 좋은 일만 잇따르는 경우는 없을터이니, 뒷목이 서늘할 만큼 당황스러운 날, 일과 사람에 치여 삶이 고되게 느껴지는 날에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 


실크의 감촉은 보드라웠고, 사용이 서툴러 벌써 얇게 올이 나간 자국이 보이지만, 나는 앞으로 이 스카프를 자주 두르고 다닐 것 같다. 소중한 것, 갖고 싶었던 것일수록 아끼지 말고 자주 사용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미루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누리고, 감사해하며 살아가고 싶다. 잘 접어둔 스카프를 내일 출근 준비 때에도 집어 들어봐야겠다. 잘자 스카프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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