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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Mar 05. 2019

5. 장엄한 대자연을 마주하다.

피쉬리버 캐년, 나미비아


 새 옷에 새 신발을 신고 첫 데이트를 나갔는데 비가 내린 다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도 새로움을 맞이하는 설렘으로 들뜨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 캠핑에서 비를 만나 텐트에 누워 빗소리를 듣고 있지니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였다. 풀벌레 소리마저 숨죽인 조용한 캠핑장에 아내와 단둘이 누워 텐트를 투둑 투둑 치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니 뭔가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 싶다가도, 비좁은 텐트 입구에 쪼그려 신발을 신고 비를 맞으며 진흙탕을 밟고 샤워실을 가는 길에는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하필이면 캠핑 첫날에 비라니...


 여행을 하면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날씨가 여행의 감성에 차지하는 비중은 꽤 컸다. 누군가에게는 밝고 화려한 이미지의 인생 여행지가 또 다른 이에게는 우울하고 축축한 이미지로 남길 수 있는 것이 날씨의 힘이다. 게다가 그 여행이 캠핑 여행이라면 날씨는 더더욱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무리 추적추적 비 오는 날의 낭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질퍽질퍽한 진흙탕에서 비를 맞으며 흠뻑 젖은 텐트를 개는 경험까지 좋아하기는 힘들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씨를 탓하면서 기분을 망치지 않고 나름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좁디좁은 텐트 안에서 간신히 차 한잔을 끓여 먹으면서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비를 즐겨보기 위해 노력하며 첫 캠핑의 밤을 보냈다.


설마 비가 오겠냐는 생각에 타프를 사지 않았더니 첫 캠핑에 비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자 다행스럽게도 비는 이미 그쳐있었고 촉촉이 젖은 공기는 상쾌하게 느껴졌다. 온통 젖은 캠핑 장비들을 대충 개어 넣고는 캠핑장을 나섰다. 어제는 해 질 녘이 다 되서 급히 들어오느라 둘러볼 여유가 없었는데, 아침에 나서면서 보 Vanrhynsdorp는 이런 외딴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싶을 정도로 사막의 신기루 같은 마을이었다. 지도 위의 점보다도 작아서 평생 존재도 몰랐을 작은 마을에 하룻밤을 묵는 경험은 자동차 캠핑여행이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슈퍼마켓도 정육점도 식당도 옷가게도 하나씩만 존재하는 그림책 속의 마을 같은 곳을 떠나서 다시 지평선 너머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도로 위로 올라섰다.


 3시간 남짓 동안 거의 변하지 않는 풍경을 보며 운전을 했다. 이따금씩 큰 나무와 벤치 하나뿐인 Rest area에 멈춰서 쉬어가기를 반복하던 중에 드디어 나미비아로 넘어가는 국경이 나왔다. 여행 중에 육로로 국경을 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할 수 없는 그 경험은 매번 나를 설레게 했다. 유럽에서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새 국경을 넘어가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마치 우리나라의 시, 도 경계를 넘는 느낌이었지만, 여타의 국가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는 과정은 출국과 입국 심사와 화물 검사, 때로는 검역까지 거치게 된다. 남아공 출국을 위해 차량 검색을 받고 차량 이동 서류를 검사받았다. 아마도 야생 동물이나 밀수품을 소지하고 있지는 않을까 수색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차가 통과된 이후에는 사무실에 들러 여권에 출국 도장만 찍으면 된다. 남아공 출국 절차를 마치고 다시 운전을 하여 나미비아와 남아공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는 오렌지강을 넘어 나미비아 땅에 들어섰다.


나미비아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오렌지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달리자 나미비아 입국 사무소가 나타났다. 드디어 힘들게 받은 나미비아 비자가 힘을 발휘할 시간이다. 다행스럽게도 까다로운 질문 없이 입국은 허가되었지만 차를 가지고 국경을 넘자니 차량 입국세를 내야 했다. 공항을 이용하면서 입국세, 출국세를 내본 적은 더러 있었지만 차량에 따른 입국세는 처음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미비아는 남아공의 통화인 랜드를 1:1 환율로 사용이 가능했기에 따로 환전하지 않고도 해결할 수 있었다. 국경 사무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국경을 넘기 위한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대부분 우리와 같이 자동차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우리와 다른 점은 다들 하나같이 사륜구동의 SUV 차량이거나 커다란 바퀴의 픽업트럭을 운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렌트한 작은 해치백 세단이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미비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B1 도로에서 벗어나자마자 끝없는 비포장 모래길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앞으로의 여행이 상당히 힘들어질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나미비아 국경 세관과 검역소


 비록 2차선이긴 하지만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있는 도로를 달리다가 목적지인 Ai-Ais 캠핑장으로 향하는 도로로 들어서자 차선이 없는 비포장 도로가 펼쳐졌다. 잠깐 이러다 말겠지 하며 달렸지만 황무지를 가르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는 끝이 없었다. 그나마 평탄하게 보이도록 다듬어진 도로이기는 하지만 온몸을 울리는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뿌연 흙먼지를 휘날리며 몇 시간을 달려야 했다. (사실 이후에 나미브 사막을 향하는 길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누런색의 황무지만 보이는 황량한 공간에 오직 우리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마치 영화 '마션'에서 맷 데이번이 연기했던 마크 와트니가 되어 화성 위를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서울 만큼 고요하고 적막한 대지를 요란하게 달리기를 두세 시간 만에 Ai-Ais 캠핑장에 도착했다.


비포장이긴 해도 잘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운전하는 내내 디스코 팡팡을 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황무지 끝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번듯한 리조트 건물과 야자수가 서있는 녹색 정원이 나타났다. 사실 오아시스가 맞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1850년대에 잃어버린 양을 찾던 목동이 발견한 온천이 지금은 피시 리버 캐년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을 위한 리조트로 개발되었다. 그래서 리조트는 온천수를 이용한 스파와 수영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사막 한가운데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나 물이 콸콸 쏟아졌다. 어젯밤 흠뻑 젖은 텐트를 야자수 아래에 자 잡아놓고 온통 모래먼지로 까슬까슬해진 몸을 씻고 오니 텐트와 집기들은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뽀송뽀송하게 말라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바로 서늘해지기 시작한 바람에 기분도 상쾌해졌다. 어제의 우울한 캠핑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잘 정리된 환경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검은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보면서 아내와 나란히 앉아 맥주 한잔을 들이켰다. 입가에 쌉쌀한 맥주 향이 감돌고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순간, 아침의 축축함도 지루했던 운전도 모두 지워지고 이 순간의 행복감에 빠져 들었다. 역시 캠핑은 날씨가 8할을 좌우한다.


Ai-Ais 리조트의 캠핑구역과 공동 취사장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온천이라니! 이게 바로 오아시스.


 비록 작은 텐트의 불편한 잠자리였지만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쾌적하고 편안하게 자고 일어났다. 어제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했던 터라 기절하듯이 숙면을 취하고 일어났더니 새 몸을 얻은 듯이 상쾌했다. 캠핑장의 사람들은 다들 아침 일찍 분주하게 주변 정리를 하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남아공을 떠나면서 준비해 온 식재료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피쉬리버 캐년에서 먹을 도시락을 쌌다. 텐트 내부를 정리하던 중에 갑자기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텐트 밖으로 나갔더니 눈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원숭이 무리들이 우리 테이블을 습격해서 아침 식사를 위해 만든 샌드위치와 점심 도시락을 들고 도망치고 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대처하지도 못하고 영화 같은 상황에 멍하니 녀석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나타난 캠핑장 관리요원이 긴 장대를 휘두르며 쫓아갔만 우리의 도시락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어제 체크인할 때 '바보'를 조심하라는 직원의 말에 '웬 바보?' 하며 웃고 넘겼는데, '바보'가 아니라 '바분 (baboon)'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새로운 단어를 배우자마자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원숭이의 습격으로 아침밥과 점심 도시락까지 모두 잃었다.


 바분 녀석들이 빵 봉지를 통째로 들고 가는 바람에 아침 식사와 점심 식사는 비스킷으로 정해져 버렸다. 퍽퍽한 비스킷을 삼키며 텐트를 정리해서 캠핑장을 떠났다. 둘러 캠핑장을 떠난 이유는 날이 너무 뜨거워지기 전에 리쉬리버 캐년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캠핑장 정문을 벗어나자 마치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듯이 녹색의 푸르름은 다시 황갈색 비포장 도로로 변했다. 달리는 동안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끝없는 지평선과 모래뿐이었기에 이 길의 끝에 경이로운 자연경관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마치 영원히 잡히지 않는 무지개의 끝을 향해 가는 기분이 들 때쯤에 흡사 보호색으로 숨어있는 듯한 모래색의 국립공원 관리소가 나타났다. 관리소를 지나 절벽 끝으로 운전해갔다. 길이 사라지는 그곳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 다음으로 크다는 길이가 160km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협곡. 바로 피쉬리버 캐년이었다. 수억 년의 시간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이 거대한 대자연의 작품을 보는 순간, 멋있다는 감정보다는 너무나도 엄청난 광경에 위압감이 느껴지고 카메라를 들이대기가 조심스러울 정도의 경외심이 들었다.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사람들이 자연을 숭배하던 이유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천재적인 인간들이 만든 대단한 작품을 볼 때면 벅찬 감동을 느꼈지만, 이렇게 대자연이 만든 걸작은 나로 하여금 숙연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존재만으로도 위압감과 경외감이 느끼게 했던 피쉬리버 캐년


 피쉬리버 캐년의 장대한 풍경을 오랫동안 감상하기에는 날씨가 점점 뜨거워져 갔다. 전망대 곳곳에는 일사병으로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안내가 보였다. 나에게 하는 경고 같은 생각이 들어서 뜨겁고 건조한 사막 기후를 피해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 목적지도 만만치 않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진짜 모래언덕이 가득한 곳, 나미브 사막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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