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무직입니다만 02]
서른 무직입니다만
서른 살 백수. 시험용 글쓰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에세이.
터질 게 터지고야 말았다.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을 여과 없이 터뜨렸다. 단톡방은 금세 싸움터가 돼버렸다. 한 시간 가까이 친구와 날 선 말들을 주고받고 난 뒤에서야 승자와 패자 없는 싸움이 끝났다.
단톡방은 친구 A의 결혼을 앞두고 만들어졌다. 우리는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30대가 된 지금까지도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야, 라고 물으면 퍼뜩 떠오르는 그런 사이다. A가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마 우리의 마음은 비슷했을 것이다. 찡하면서도 기쁘고, 아쉽지만 또 흔쾌히 축하할 수 있는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은 뭐든 해주고 싶었다. 웨딩사진 촬영장에 따라가 헬퍼 노릇을 자처하고, 주변에서 모으고 모은 알짜배기 결혼 정보를 알려줬다.
결혼식이 세 달쯤 남았던 무렵, A가 없는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B는 축의금을 어떻게 할지 물었다. A의 결혼 소식에 복잡 미묘한 감정들 중 마음 한편이 무거웠던 이유는 축의금 때문이었다. 나를 제외한 친구들은 모두 취업을 한 상태였다. 무일푼 백수는 나뿐이었다. B는 넷이서 100만 원을 모아서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가장 친한 친구’ 무리에서 나온 첫 결혼인 만큼 최대한 잘해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내가 막연히 생각하던 금액은 10만 원이었다.
100만 원은 10만 원의 열 배다. 4분의 1을 해서 25만 원씩 낸다고 쳐도 10만 원의 두배가 조금 넘는다. B가 100만 원을 언급하며 그 뒤에 덧붙인 말들을 곱씹을수록 내 마음의 크기가 굉장히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A를 생각하는 내 마음은 고작 10만 원짜리인 걸까. 100만 원을 생각한 친구의 마음은 나보다 열 배만큼 더 큰 것일까. 10만 원짜리 마음. 친구에 비해 10분의 1에 불과한 내 마음의 크기가 부끄러웠다.
마음이 쪼그라들수록 나 또한 한없이 작아졌다. 친구들이 단톡방에서 말을 주고받는 사이 나는 부끄러웠다가 서글퍼졌다가 이내 화가 났다. 25만 원은 핸드폰비와 교통비를 제하면 내 한 달 생활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한 달 수입이 200만 원인 사람에게 25만 원과, 한 달 수입이 0원인 사람에게 25만 원의 크기는 같다고 볼 수 있을까. 내 상황에서 10만 원을 생각한 것이, 너가 25만 원을 얘기한 것에 비해 과연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축의금 벌겠다고 전단지 돌렸잖아."
사회에서 만난 친구 C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C는 30대 취업준비생으로 나와 처지가 비슷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의 축의금을 벌기 위해 전단지를 돌렸다고 했다. 3일을 꼬박 일해서 10만 원을 모았다고. 그런데 그 10만 원을 전부 축의금 봉투 안에 선뜻 넣기는 어려웠다고. 친구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을 축하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단지를 건네야 했던 순간의 마음, 결혼식장에서 본인이 마치 들러리 같았다는 그 마음들에 대해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내 머릿속에서 번져갔다. 난 C처럼 할 수 있을까, 자문했다. 나를 갉아먹으면서까지 무리해서 돈을 벌고, A를 축하하는 내 마음을 돈으로 증명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터뜨리고야 말았다. 25만 원은 너무 많다고, 너 내 상황을 생각이나 한 거냐고, 너한테 25만 원과 나한테 25만 원이 같냐고, 나도 마음만큼은 A에게 100만 원을 모아서 주고 싶다고, 최대한 잘해주고 싶다고,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도 결국 본인이 처한 위치에서 비롯되는 거라고, 너가 25만 원을 얘기할 수 있는 건 너의 상황이 그걸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인 거라고. 이 생각들을 전부 다 쏟아냈는지 절반만 말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단톡방에서 친구들을 할퀴는 말들을 던지고야 말았다.
이 싸움의 종말은 우습게도 나의 취업으로 흐지부지됐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지 생각지도 않았던 인턴 채용에 붙었고 나는 25만 원을, 나를 갉아먹지 않아도 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A의 결혼 이후에도 그 단톡방은 없어지지 않았다. A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 집들이 선물을 준비해야 했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 A의 임신과 출산으로 아기 선물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그 일이 있고 나서 선물이나 돈을 써야 할 땐 우리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서로를 향해 과도한 배려가 오고 갔고, 말 하나하나에도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더 이상 섣불리 금액을 제시하는 일이 없어졌고, 각자 상황에 맞게 마음 표시를 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돈이 뭐길래, 가장 친한 친구들끼리 이렇게 얼굴을 붉히고 조심스러워져야 하나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 돈 때문에 멀어질 사이라면 결국 고만고만한 관계인 거 아닌가 하는 울컥하는 마음이 불끈 솟아오르기도 한다. 도대체 돈돈돈. 돈이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