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열의 디지털 콘서트
지난 토요일 한겨레신문 주말판 표지를 장식한 특집 기사 ‘버려진 책, 살려낸 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 도서관 장서의 종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다큐멘터리다. 장장 네 페이지에 걸친 특집 기사에서는 울산대학교 중앙도서관의 장서 폐기 과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울산대는 지난해 6월 학교 도서관 전체 장서 92만 권 중 절반에 해당하는 약 45만 권을 폐기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학교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명분은 디지털 열람실, 전시관, 노트북 존, 메이커 스페이스, 카페 등이 갖춰진 미래형 도서관 구축을 위해서는 스페이스가 필요하고 스페이스 확보를 위해서는 장서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폐기 대상을 가르는 1차 기준은 대출 실적이다. 오랜 기간 대출 실적이 없는 책을 굳이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서관에 등록된 동양서 중 2010년 이후 대출이 한 번도 없는 책은 이후에도 대출될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라는 것이다. 이런 책들을 보존하기 위해 스페이스는 물론 관리 비용까지 지불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 번째 기준은 국회도서관 등에서 컴퓨터로 조회할 수 있거나, 구독 데이터베이스(DB) 서비스로 열람할 수 있는지 여부다. 조회와 열람이 가능한 경우에도 폐기 목록에 올라갔다. 이렇게 해서 선정된 약 45만 권의 폐기 리스트를 받은 교수 중 인문 사회계열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학교 결정을 반박하고 나섰다.
책의 오디세이 ② 45만권의 생사 (한겨레 10월 26일 주말판 [커버스토리] 보도화면 갈무리)
반박은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인문학적 접근이다. 대출 횟수 등이 책의 가치를 결정짓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보관된 많은 책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하나의 문화적 결과물이라서 폐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다른 접근은 학교가 미래형 도서관 구축에 필요한 스페이스 확보를 위해 폐기 장서의 규모를 미리 계산했다는 공학적 비판이다. 45만 권 정도를 폐기해야만 공간 확보가 가능하기 때문에 미리 폐기 분량을 결정하고 이후 폐기 기준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반박 모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박 논리들이 장서의 폐기 결정 자체를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폐기 자체는 인정하되 폐기 규모는 축소하자는 것이 학교와 반대 교수들 사이에 체결된 일종의 신사협정이다. 협정 및 여러 노력 결과 처음 폐기 대상이었던 45만 1,982권 중 17만 5,294권이 살아남았다. 최종 폐기 대상 중 일부는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무료 배부되었지만, 그 양은 적은 편이다. 결국 약 26만 권 이상이 폐기 처분되었다. 울산대의 장서 폐기가 주목을 끈 이유는 당연히 그 규모에 있다. 대학들은 소장 장서의 7% 이내에서 폐기할 수 있다는 도서관법 시행령에 의거, 해마다 일정 규모의 장서를 폐기했지만, 보유 장서의 1/3 가까이 폐기하는 경우도 울산대가 처음이다. 물론 울산대 역시 관련 법령을 준수하고 있다. 특별한 경우에는 7%를 초과하여 폐기 할 수 있다.
울산대에서 일어난 장서 폐기 사건은 단지 울산대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다른 대학들 역시 폐기 규모는 울산대보다 작지만, 꾸준히 장서를 폐기해 왔고 폐기 장서의 규모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대학 구성원들이 더 이상 책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 정보와 자료는 분명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교수와 학생들은 정보와 자료를 이제 더 이상 도서관 서가에서 찾지 않고 서버에 보관되어 있는 D/B에서 찾는다. 검색 하나로 모든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인프라가 구비되어 있는데 굳이 특정 공간에서 절차를 거쳐 정보와 자료를 얻을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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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종이책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히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나온 일부 서적들은 특정 시대의 문화, 언어, 예술적 스타일을 담고 있으며, 이는 디지털화만으로는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물성을 갖고 있다. 특히 오래된 문헌이나 절판된 서적은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어 다음 세대를 위해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런 책들은 대출 횟수나 열람 여부와 상관없이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모든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어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는 정보와 자료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재라는 관점을 수용하여, 별도의 공간에서 보관할 필요가 있다.
이제 공공기관에서 모든 책을 구매, 보존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정보와 자료는 종이책과 D/B로 구분되기 시작했고, 도서관은 점차 디지털 D/B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도서관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책들이 서가에 꽂히겠지만 규모는 계속 줄어들고 서가는 사람들이 쉽게 읽히는 책들로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종이책은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매체가 아니라 물리적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장품으로 전환된다. 디지털 음원 시대에도 여전히 LP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에도 여전히 종이책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적 애호가들은 계속 존재하겠지만, 그 규모는 서서히 축소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