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전에서의 3년간 연구원 생활을 마치고 2017년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짧은 기간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새로운 업무를 추진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 느낌이었다. 직장 생활 외에도 미술을 배우고, 또 커피 로스팅 자격증까지 취득했으니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나는 연구원같이 맡은 부분만 완벽하게 해내면 그 외의 시간은 운용하기에 따라 어느 정도 확보가 가능한 일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급이나 직위에서 밀려나면 도태되는 회사생활이나 고객에게 끊임없이 잘 보여야 하고 때로는 접대까지 해야 하는 사업 같은 일이 어쩌면 나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적성에도 맞이 않고 능력도 모자란 내가, 그 어려운 사업을 5년간이나 했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하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스로 위안을 한 적도 많다. 그런데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히 세계 최초라 불릴 만한 제품을 시장에 내놓았고 몇십억 원 매출도 올려 봤다. 모바일 업계의 최고 상도 받아 보고 세계가 인정해주는 디자인 상도 받아 봤다.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시간이었다. 노력과 정성, 시간, 돈, 그리고 가족의 희생까지도.
혹자는 나에게 사업은 처음에는 다 실패한다. 처음부터 성공하는 사업은 없다. 이 정도 성과를 낸 걸 보면 소질이 있는 것이다. 다시 도전해 봐라. 이렇게 말들을 많이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커다란 빚만 남기고 끝난 사업은 정리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다시 해보겠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았다. 민사 소송만 3개, 노동청 고발 건 등 굵직한 사건들만 처리하는데도 나의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 솔직히,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마음만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해 줄 열정과 체력, 그리고 자금력이 없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그 어떤 원천적인 것, 그것이 이미 내 몸에서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꺼져버린 기관차의 엔진처럼. 물론 세상에는 이보다 더 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끝내 성공을 거머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과 다르고, 또 다른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었으며, 꼭 그 사람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나만의 다른 인생이 있는 것이지 더하거나 못한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도대체 성공이 무엇이길래.
고생과 실수투성이의 사업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은 중의 하나는, 절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절대로.’
그렇다고 계획이 불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계획은 필요하다. 계획이 있어야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시작하기는 불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계획을 세워 놓으면 앞으로 무슨 준비를 해야 하는지 대략 머릿속에 정리가 된다. 그래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뭐라도 생각을 하고 대처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계획이 필요한 이유는 고객이든, 협력 업체든, 지인이든 간에 내가 뭘 할 거라고 말할 스토리가 생긴다. 사업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반복해서 설명해야 할 때가 수도 없이 많다. 계획이라도 서 있으면 이렇게 말해야 할 때 조리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남들이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하고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 준다.
계획을 세울 때는 가슴이 벅차고 마치 세상이 내 마음대로 움직일 것처럼 자신만만하다. 그러나 현실은 아쉽게도 나와 당신이 가는 길에 반드시 장애물을 놓아둔다. 그 장애물들을 다 넘고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더 큰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라고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에 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오늘 오후 두 시까지 은행에서 대출금 2억 원을 보내주기로 했으니, 이 돈을 부품 업체에 바로 보내주면 다음 주에 주문한 부품을 받을 수 있겠지. 그것을 받아 조립하면, 100대니까 2주는 걸릴 거야. 그러면 이달 말까지 약속대로 통신사에 납품을 할 수 있겠구나.’
예를 들면 이게 내 계획 중 하나였다고 치자. 그런데 대출금 받기로 한 날 은행에서 오전에 전화가 온다.
“안녕하세요 정사장님? 오늘 오후에 대출금 나가는 걸로 되어 있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침을 꿀꺽 삼킨다. 무슨 또 문제가 생겼나?
“아 네 그렇죠. 차질 없이 받을 수 있는 거죠? 저랑 점심이라고 하실까요? 하하.”
사업가에게 공무원과 은행은 갑 중의 갑이기 때문에 항상 유리그릇 다루듯 정성을 다해 맞춰줘야 한다.
“네 하하. 그러면 좋은데 선약이 있어요. 그런데 어쩌죠? 저희 지점장님께서 갑자기 출장을 가시는 바람에 자금이 오늘 못 나갈 것 같아요. 결재라도 해 놓고 가셨으면 되는데 결재가 안 나있더라고요.”
나는 혈압이 오르기 시작하고 입에 침이 바짝 마른다. 이게 또 무슨 말인가..
“네? 그러면 안 되는데요. 차장님 오늘 부품대금이 꼭 집행이 돼야 해요. 안 그러면 저희 납품일정에 차질이 생겨서 안돼요. 클레임 받을 텐데..”
“네.. 사정은 이해 갑니다만. 어쩌죠.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4-5일은 지연될 것 같은데요..”
“네? 4-5일 씩이나요? 그럼 정말 큰일 나는데!”
“일본으로 출장을 가셔서요. 제가 안 그래도 이메일은 보내 놨는데, 뭐라고 하실지.”
“아 차장님,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제가 직접 전화를 드려 볼까요?”
나는 은행과의 전화 통화를 일단 마치고 바로 부품업체에 전화를 건다. 그리고 업체 사장님한테 사정사정을 한다. 4일 후에는 반드시 입금 처리가 되니까 미리 생산에 들어가 주면 안 되냐고. 그러면 그 영세한 부품 업체에서는 이렇게 말을 한다.
“사장님, 무슨 말씀이신지 다 알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희도 자금력이 없어요. 그 돈을 받아야 저희도 필요한 자재를 사 올 수 있는 거예요. 자금이 있으면 저희가 선 집행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앞이 깜깜 하지만 이게 제조업의 생태계이고 현실이다. 큰 업체에서 작은 업체로 갈수록 상황은 더 심해진다. 말이 제조업 주식회사지 하루 벌어 하루 생활하는 일용직 처지와 다를 바가 없을 때가 많다.
나는 또 가슴이 꽉 막히고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 돈을 안 보내주면 부품업체로부터 필요한 부품을 공급받을 길이 없게 된다. 대기업에 납품 일정을 어기면 정말 큰일 나는 것이다. 나는 업체 사장과의 전화를 마치고 바로 개발자들을 모아 회의를 소집한다.
“여러분, 계획에 차질이 좀 생겼습니다.. 공급받기로 한 부품 일정이 좀 늦어질 것 같습니다. 오늘 업체에 부품대금을 보내줘야 하는데 그게 좀 미뤄졌네요.. 먼저 좀 생산을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거기도 사정이 어려워서 힘들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개발자들은 그리 놀라는 표정도 아니다. 개발을 하다 보면 가끔 일어나는 일이니까.
“하는 수 없네요. 우리가 납품 일정을 어기면 안 되니까, 그 부품이 필요한 부분만 제외하고 우리가 조립할 수 있는 부분부터 먼저 작업을 해 나갑시다.”
개발자들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하다. 왜냐하면, 내가 제안한 대로 하면 하루 이틀이라도 시간을 앞당길 수는 있지만 같은 작업을 두 번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한다.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레고처럼 이 부분 저 부분을 똑 떼어서 조립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부품 없이 조립을 해 놓아도 그 부품을 넣게 되면 어차피 다른 부분도 거기에 맞춰 다시 다 조정해야 하고 테스트해야 하니까. 사장의 지시니까 따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다음은 정말 어려운 과제가 남는다. 납품처이자 우리의 최대 고객인 통신사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 문제다. 우리는 납품 대금을 받아 매출을 일으키고 먹고사는 것이니까 그들은 우리의 목줄을 쥐고 있는 존재다. 제품의 납기 일자는 계약서에 명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일이 틀어지면 법적인 문제로까지 번질 소지가 있다. 나는 반나절을 고민하다 다음날 회사로 찾아가기로 한다. 감히 전화로 협의할 문제가 아니다.
다음 날, 실무 담당 과장을 만나서 얘기를 꺼낸다. 이만 저만 해서 부품 공급이 제때 안되다 보니 조립이 늦어지고 어쩌면 납기가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면 그 과장은,
“아 사장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런데 납기를 어기면 안 되는데. 아시잖아요. 이럴까 봐 저희가 애초부터 자금력이 있는 큰 업체랑 하려고 했던 거예요. 사장님 회사 기술력 하고 사장님 인품만 보고 계약한 거 아시잖아요.”
안다. 왜 모르겠나. 굳이 자존심 상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나도 대기업에 납품하게 된 걸 감지덕지하고 영광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내 힘으로 안 되는 상황인데.
“과장님 제가 어떻게든 납기는 꼭 지키도록 해 보겠습니다. 일정을 바꾸면 계약을 다시 해야 하니까 일이 너무 커지고요, 혹시 말인데요..”
나는 중요한 말을 앞두고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얘기를 이어간다.
“납품 대금 일부를 좀 선불해주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당장 부품 사 와서 조립 시작할 수 있고 납품도 제때 되고요.”
“사장님, 그건 더 힘든 일이에요. 차라리 일정 변경 계약서를 쓰는 게 더 빠릅니다. 돈 문제는 제일 까다로운 거예요. 저희 팀 임원 결재에 재무팀장 결재까지 다 받아야 가능한 거구요. 게다가 선불이라는 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구요. 아마 한 달은 걸릴 겁니다.”
나는 아쉬움과 실망감이 겹쳐 얼굴이 달아오른다. 고개를 푹 숙이고 납기를 최대한 맞춰 보겠다는 말만 다시 하고 돌아온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대출금은 예상보다 4일이 지난 시점에서 입금이 되었고 납기는 간신히 맞출 수 있었다. 우리 개발팀이 3일 밤을 새워가며 조립을 했기 때문에..
사업계획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업계획서 위에 먼지만 쌓여갈 뿐 눈코 뜰 새 없는 현실에서는 들여다볼 시간도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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