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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Apr 09. 2021

나의 뒷담화 규칙

남들에게 내 기분을 허락받지 말 것

“내가 예민한 걸까? 너네 같으면 어떨 것 같아?”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날 사무실에서 확인해야 할 시안이 도착해서, 내가 H한테 부탁했다? 다른 사람들도 확인해야 하니까, 벽면 한쪽에 붙여놓으라고. 근데 H가 지난번에 대표님이 시켰을 때는 그냥 바닥에 놓고 확인했다고 말하는 거야. 아니, 굳이 걔는 그런 얘기를 나한테 왜 하는 거야?"


요즘 내 눈에 직장 동료 H만 1.5배 확대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H가 묘하게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나는 H가 내뱉는 사소한 단어 하나에도 크게 움찔하고, 가벼운 장난에도 숨겨져 있는 저의를 파악했다. 쟤는 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나를 무시하나? 내가 만만한가?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음.. 난 잘 모르겠어. 그렇게 화는 안 날 것 같은데.. 그 업무가 중요한 일이었던 거야? 그거 말고 또 거슬리는 행동은 없어?” 그동안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는 ‘H_무례한 사례_모음_2020’ 폴더를 더블 클릭했다. 결국 간신히 친구들의 동의를 얻은 것 같았다. H는 정말 예의가 없고, 이상한 애인 것 같아~. 그제야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


내가 H를 싫어하는 건 내 친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서 근황 토크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바로 ‘막 돼먹은 H’였다. 그런데 H에 대한 뒷담화를 할수록 마음속 한구석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바로 나의 ‘너네 생각은 어때?’ 되묻기 화법. 질문을 하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유독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H의 무례함이 객관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친구들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날도 H의 개념 없는 일화를 카톡으로 생중계 중이었다. 또 어김없이 등장한 나의 되묻기 질문이 등장했다. “야 너네는 회사 동료가 아니고, 그냥 친구가 이렇게 말하면 어떨 것 같아?” 친구가 장문의 카톡을 보내왔다. “내가 요즘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데, 그런 거는 고민할 필요도 없어. 상담 선생님이 그러는데 전쟁에 나갔던 사람이랑, 전쟁에 나가지 않았던 사람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대. 그래서 어떤 상황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내가 예민한가? 나만 이런 건가? 이런 판단을 스스로 내리지 말래.”


스치듯 예전에 네이트 판에서 본 인기글이 동시에 떠올랐다. “여자분들 왜 기분을 허락받아요?”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서, 꼭 ‘제가 너무 예민한 걸까요, 제가 기분 나빠해도 되는 걸까요?’라는 글이 엄청 많은데, 진짜 기분 나빠할 줄도 모르는 것 같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나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서 기분이 불쾌했는데도, 내 기분이 나쁜 이유를 제3자에게 확인받아야지만 안심한 셈이었다. 친구가 말해준 '전쟁에 나간 사람' 이야기 덕분에 H를 마음껏 싫어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이후로, H에 대한 뒷담화는 여전했지만, 친구들에게 내 감정을 확인받지 않으려 노력했다. 앞으로 H의 뒷담화는 계속될 것이다. 내 마음을 의심하지 말고, 내 감정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규칙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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