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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Sep 30. 2019

술의 흔적

그는 떠나고 술만 남았다

지금 후문으로 올래? 수업이 끝난 후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 있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마침 가을바람이 선선해서 집에 가기 아쉬웠던 참이었다. 사람이 늘 많은 학교 후문 닭갈비집에는 친구와 그녀의 같은 과 선배들이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2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많이 어색했다. 빨리 취해서 이 어색함을 벗어나고 싶었다. 친구는 그런 나를 무시하고 말했다. “사장님! 소금맛 닭갈비 3인분이랑 후레쉬 하나 주세요.” 


잠시 후 깊은 산장의 털보 주인 같은 닭갈비집 사장님은 소주를 가지고 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소주병 뒤를 망치 같은 거로 쾅! 내려쳤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순간에 소주는 하얗게 얼면서 슬러시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대생들이었는데,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소주를 낮은 온도에서 얼린 다음에 강한 충격을..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이렇게 되는 거야. 귀에 잘 들어오진 않았다. 


생긴 건 초등학교 앞에서 팔던 슬러시인데, 맛은 어른들만 먹는 소주라니. 성립될 수 없는 두 가지 조합이 합쳐진 소주 슬러시가 마치 어떤 예술처럼 느껴졌다. 처음 먹어보는 소주 슬러시의 맛은 신선했다. 차가운 얼음 조각이 혀에 닿자마자 녹아버리고 그 끝에 따라오는 알싸한 알콜의 향기. 왜 이제야 이 닭갈비집에 온 거지? 갑자기 이 사람들이 좋아지고, 이 어색한 분위기가 좋아졌다. 우리는 빠르게 소주를 비우고, 한 병 더 주문했다. 많이 바빴던 산장 아저씨는 이번엔 망치로 치지 않고, 소주만 주고 갔는데.. 그때 사건이 시작됐다. 


친구의 학교 선배가 맨손으로 소주병 뒤를 쾅 내리쳤다. 소주는 사장님이 망치를 쳤을 때와 똑같이 슬러시로 휘리릭 변하기 시작했다. 헉 뭐야… 너무 멋있잖아? 사장님~망치 어디 있어요?라고 그가 물었다면 나는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을 텐데. 그는 맨손으로 과감하게 소주를 때려잡았다. 그것도 아무렇지 않게. 그제야 그가 왼손잡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고, 팔뚝에 있는 문신이 눈에 보였다. 짧은 머리의 동그란 두상이 보였고, 작은 눈은 웃을 땐 더 작아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내게 ‘술’이란 코끝을 찌르는 알콜향과 함께 쓴맛이 나는 음료일 뿐이었다. 개강총회같이 여러 사람이 모일 때만 분위기에 맞춰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런데 그와 단둘이 만나기 시작하면서 마시게 된 술은 이상하게 쓰지 않았고, 이상하게 잘 넘어갔다. 천천히 취기가 오르면, 기분이 몽롱하고 아른하게 좋아졌다. 술에 취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말들을 했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도 했다. 술은 내 마음을 조금씩 벗겨놓았다. 어딘가에 마음을 꽁꽁 숨기는 버릇이 있는 나를 솔직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그와 다시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나는 조금 달라졌다. 식당 메뉴판의 FOOD보다 DRINK를 더 꼼꼼히 살펴보게 됐다. 사이다보다 맥주 500cc를 더 좋아하게 됐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세계가 내 안에 들어와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내게 술을 새겨놓고 떠났다. 


앞으로 나는 그가 새겨놓은 술의 흔적들을 더 넓혀볼 계획이다. 바카디, 한라토닉, 알밤막걸리까지. 또 그만큼 다양한 술친구를 만나게 될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의 세계에 나의 흔적을 새기는 과정을 반복하며. 아, 시원한 소주 슬러시가 땡기는 선선한 가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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