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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Oct 11. 2020

우정의 얼굴을 한 사랑의 모습

그때는 우정인 줄 알았지

내일 학교 빨리 가고 싶다. 저녁에 티브이를 보다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엄마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봐서 허겁지겁 변명하듯 말했다. 아, 그냥 친구들이랑 놀고 싶어서.


우리는 제대로 이야기해본 적도 없었지만, 한 달에 한번 자리를 바꾸는 탓에 짝꿍이 되었다. 어느새 나와 그 애는 편지를 주고받고, 서로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빨간 머리 앤과 카드캡터 체리를 좋아했다. 나는 앤을 할게 네가 다이애나를 해. 그럼 나는 체리를 할게 네가 가을이를 해. 나는 그 애와 함께 있을 땐, 주근깨 빨간 머리 앤이었다가,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입는 가을이가 되곤 했다. 함께 주고받는 편지에는 서로의 이름 대신 “앤과 다이애나” “체리와 가을”로 불렀다.


긴 겨울방학, 그날은 다이애나의 집에서 같이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다이애나의 엄마가 아침을 먹으라며 우리를 깨웠다.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밖으로 당장 나가서 놀고 싶었지만, 혼날까 봐 꾸역꾸역 숟가락을 들었다. 밥은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때 다이애나가 밥을 빨리 먹는 방법을 알려줬다. 밥알을 숟가락으로 꾹꾹 눌러서 밥이 납작해지면, 숟가락으로 네 등분하는 방법. 네 숟가락이면 밥을 뚝딱 먹을 수 있다고 했다. 꾹꾹 누른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볼이 터질 것 같았다. 허겁지겁 밥을 먹은 뒤 눈이 쌓여서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밭을 같이 굴렀다. 뒹굴뒹굴.


우리는 4학년이 되었고 반이 달라졌다.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만 하는 그저 그런 사이가 되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그 애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이애나가 종종 떠올랐다. 그때 우리 진짜 친했는데. 지금 다이애나는 잘 지내고 있을까. 다이애나와의 추억은 다른 어떤 다른 기억보다 더 짙은 색을 품고 있었다.


스무살이 되고 몇년 후, 동네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길을 걷고 있었다. 앞에 있는 여자가 눈에 보였다. 머리를 질끈 하나로 묶었는데, 방울이 달랑달랑 거리는 노란 머리끈이었다. 다이애나도 저렇게 머리 묶었는데. 다이애나가 생각났다. 근데 혹시 다이애나 아닐까? 하얀 피부와 걸음걸이도 다이애나 같았다. 멀리 뛰어가 옆모습을 확인해보니 정말 다이애나였다. 그러나 차마 인사할 용기는 없었다.


신기했다. 몇십 년이 지났지만, 머리끈 하나로 다이애나를 알아차리다니. 내가 다이애나를 그냥 평범한 어린시절 친구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우연히 다이애나를 본 뒤, 우리의 추억을 다르게 해석해보았다. 아무래도 그건 사랑의 한 종류였던 것 같다. 우리 우정 영원히 하자고, 어른 되면 그때도 만나자고 수도 없이 편지에 적었던 그때의 마음. 그만 붙어있으라고 선생님한테 혼이 나도 계속 같이 있고 싶고, 계속 보고 싶은 마음. 우정도 여러 가지 다양한 층위로 존재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 아이와 나의 오래된 우정의 한 페이지를, 지금은 사랑으로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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