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땐, 집 밖에선 절대 거울을 보지 않았다. 교실 뒷문 바로 옆에 있는 큰 거울을 우연히 볼 때,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괴로웠다. 중학교 때부터 여드름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고, 내 얼굴은 누가 군데군데 빨간색으로 색칠한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학기 초,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날 부르며 말했다. "얘, 너 어디 아프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게?" 창피해서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그 후부터 복도에서 그 선생님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푹 숙여버렸다. 내가 정말 싫었다. 그런 날이면 집에 와서 낮에 못 봤던 거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학교에 가면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평범한 사람 축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화장을 하면 붉은 피부는 어렴풋이 가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 피부는 울퉁불퉁하고 퍽퍽했다. 지각을 해도 꼭 화장을 했고, 자주 모자를 쓰고 얼굴을 꽁꽁 가렸다. 수정 화장할 수 있는 파우치는 꼭 들고 다녔다.
이성 앞에서 내 콤플렉스는 더 새빨게졌다. 여중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어색했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남자 친구도 못 사귈 거야. 물론 진짜 속마음은 ‘예쁜 연애’가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남자 친구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친구한테 화장 안 한 내 피부는 죽어도 못 보여줘. 누가 관심을 보여도 철벽 치기 바빴고, 연애를 해도 오래가진 못했다.
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고 페미니즘으로 내 관심도 옮겨갔다. 그동안 여자가 얼마나 많이 대상화되었는지, 여성이 얼마나 신체 부위별로 평가당했는지 샅샅이 알게 되었다. 그게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확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남의 시선 때문에 이렇게 움츠려 살 필요는 없어.
하지만 결심과 행동은 항상 다르다. 또래가 많은 회사로 이직을 한 후, 화장을 지운 채 회사로 가는 게 무서웠다. 특히 또래 이성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는 일은 고난도의 문제였다. 화장을 지우면 내가 못생겨 보이지 않을까. 못생기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게 두 달은 꼬박꼬박 화장을 하고 다니다가, 어느 날 돌연 맨얼굴로 출근했다. 그날 아침에는 정말 모든 게 너무 귀찮고 피곤했다. 아 모르겠다. 정말 눈 딱 감고 그랬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내 하루는 편해졌다. 아침에 10분 더 잘 수 있고, 퇴근해서 화장을 지우느라 이중세안을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맨얼굴을 보여주는 건 아직 어렵다. 여행을 갈 때는 사진에 잘 나오고 싶어서 화장품을 챙기곤 한다. 완벽하게 맨 얼굴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한 하루를 맨얼굴로 채우는 건 아무 문제없었다. 새 빨겠던 콤플렉스도 점점 옅은 색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나는 “화장을 안 하면 좋은 점이 많으니까, 화장하지 마세요.”라는 말만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눈 딱 감고 시도하기'다. 그 시도 덕분에 지긋지긋한 피부 콤플렉스를 완벽히 이기진 못했지만, 적어도 매번 지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겐 눈 한번 질끔 감아야 할 부분이 많다. 관계를 맺을 땐 조금 더 개방적으로 내 모습 보여주기, 하기 싫은 건 하기 싫다고 말하기, 웃기지 않은 농담에는 웃지 않기 등.. 때때로 에라, 모르겠다고 눈 딱 감으면 다른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아무튼 과거보다 현재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