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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Aug 09. 2021

새빨간 콤플렉스가 옅은 색이 될 때까지

고등학교 땐, 집 밖에선 절대 거울을 보지 않았다. 교실 뒷문 바로 옆에 있는 큰 거울을 우연히 볼 때,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하는 게 괴로웠다. 중학교 때부터 여드름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고, 내 얼굴은 누가 군데군데 빨간색으로 색칠한 것처럼 얼룩덜룩했다.


학기 초, 국어시간에 선생님이 날 부르며 말했다. "얘, 너 어디 아프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게?" 창피해서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그 후부터 복도에서 그 선생님을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푹 숙여버렸다. 내가 정말 싫었다. 그런 날이면 집에 와서 낮에 못 봤던 거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대학교에 가면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평범한 사람 축에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화장을 하면 붉은 피부는 어렴풋이 가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내 피부는 울퉁불퉁하고 퍽퍽했다. 지각을 해도 꼭 화장을 했고, 자주 모자를 쓰고 얼굴을 꽁꽁 가렸다. 수정 화장할 수 있는 파우치는 꼭 들고 다녔다.


이성 앞에서  콤플렉스는  새빨게졌다. 여중 여고를 나왔기 때문에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어색했다. 남자들은 ‘예쁜 여자'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남자 친구도  사귈 거야. 물론 진짜 속마음은 ‘예쁜 연애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남자 친구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친구한테 화장    피부는 죽어도  보여줘. 누가 관심을 보여도 철벽 치기 바빴고, 연애를 해도 오래가진 못했다.


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겪고 페미니즘으로 내 관심도 옮겨갔다. 그동안 여자가 얼마나 많이 대상화되었는지, 여성이 얼마나 신체 부위별로 평가당했는지 샅샅이 알게 되었다. 그게 부당하다는 것을 느끼며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확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남의 시선 때문에 이렇게 움츠려 살 필요는 없어.


하지만 결심과 행동은 항상 다르다. 또래가 많은 회사로 이직을 한 후, 화장을 지운 채 회사로 가는 게 무서웠다. 특히 또래 이성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는 일은 고난도의 문제였다. 화장을 지우면 내가 못생겨 보이지 않을까. 못생기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그렇게 두 달은 꼬박꼬박 화장을 하고 다니다가, 어느 날 돌연 맨얼굴로 출근했다. 그날 아침에는 정말 모든 게 너무 귀찮고 피곤했다. 아 모르겠다. 정말 눈 딱 감고 그랬다.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내 하루는 편해졌다. 아침에 10분 더 잘 수 있고, 퇴근해서 화장을 지우느라 이중세안을 할 필요도 없다. 물론,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맨얼굴을 보여주는 건 아직 어렵다. 여행을 갈 때는 사진에 잘 나오고 싶어서 화장품을 챙기곤 한다. 완벽하게 맨 얼굴로 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평범한 하루를 맨얼굴로 채우는 건 아무 문제없었다. 새 빨겠던 콤플렉스도 점점 옅은 색이 되는 것 같았다.


지금 나는 “화장을 안 하면 좋은 점이 많으니까, 화장하지 마세요.”라는 말만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눈 딱 감고 시도하기'다. 그 시도 덕분에 지긋지긋한 피부 콤플렉스를 완벽히 이기진 못했지만, 적어도 매번 지지 않을 정도는 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겐 눈 한번 질끔 감아야 할 부분이 많다. 관계를 맺을 땐 조금 더 개방적으로 내 모습 보여주기, 하기 싫은 건 하기 싫다고 말하기, 웃기지 않은 농담에는 웃지 않기 등.. 때때로 에라, 모르겠다고 눈 딱 감으면 다른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아무튼 과거보다 현재 나는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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