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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Sep 02. 2021

인간관계 계산법

책 ‘긴긴밤’을 읽고

교복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야? 아직 담임 안 옴. 빨리 와!” 핸드폰 폴더를 닫고, 계단을 2칸씩, 가끔 3칸씩 날아가듯 올라갔다. 숨을 몰아쉬며 뒷문을 열자마자 폭죽이 울려 터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혜수가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들고 있었다.


아침 조례가 끝나자마자, 혜수가 내 자리로 와서 말했다. “올라올 때 계단 옆에 붙어있는 포스터 봤어?” “무슨 포스터? 뛰어오느라 하나도 못 봤는데..?” 3층에서 1층까지 다시 내려갔다. 계단 옆 벽면에 종이가 연속적으로 붙어있었다. A4 종이에 생, 일, 축, 하, 해 글자가 크게 한 글자씩 써져 있었고 중간중간 귀여운 그림도 붙어있었다.


혜수가 섭섭해했다. “야, 이거 해주려고 나 오늘 엄청 일찍 왔어.” 몰려오는 감동과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동시에 크게 빚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말로 고맙다고 표현해야 할까.. 난 혜수 생일에 뭘 해줘야 하지.. 난생처음 받아보는 생일 이벤트가 황홀했지만, 동시에 무서웠다. 혜수는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지..? 다른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야 너 대박이다, 부럽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네가 제일 웃겨.” 혜수는 다른 애들 앞에서 ‘나의 팬’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혜수는 내 앞에선 언제든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삐걱거렸다. 혜수가 이런 걸 좋아하니까, 더 과장스럽게 표현해볼까? 혜수가 이럴 때 자주 웃으니까, 다음에 다시 한번 말해봐야지. 혜수가 체육시간에는 이렇게 하는 거 좋아하니.. 그럴수록 뭔가 어색하고 답답했다.


정작 나는 혜수의 생일에 뭘 해줬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작은 선물과 편지 정도를 준 것 같다. 혜수와는 스르륵 멀어졌다. 내가 혜수를 부담스러워하는 걸 혜수가 눈치채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뭐 그렇다. 하지만 17살의 혜수가 나에게 해준 생일 이벤트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다시 나에게 그런 이벤트를 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안다.


‘나한테 왜 이런 걸’ 의문은 성인이 돼서도 반복되었다. 이유 없이 주는 깜짝 선물에는, 왠지 꼭 나도 보답 선물을 사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밥을 사줄 때도, 다음번엔 꼭 내가 밥을 사야 할 것 같았다.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가 내 뿌리 속까지 박혀 있었다. 한 번은 친구 어머니가 밥을 사줬는데,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에 친구 동생의 생일선물을 고르고 있자, 다른 친구가 말했다. “아니, 뭘 그렇게 까지 해야 해?”  이렇게 해야 내 맘이 편한 걸 어떡해..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동화 ‘긴긴밤’을 읽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읽었는데, 어느새 눈이 빨개지고 콧물이 마스크 속에서 주르륵 흘렀다. 슬프면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코끼리 친구들과 살게 된 코뿔소 노든은 자신이 코끼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긴 코와 큰 귀 대신, 뿔이 자라자 노든은 불안해한다. 그러자 할머니 코끼리가 이렇게 말한다.

긴긴밤 표지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내가 만약 노든이라면 어떨까. 나를 도와주는 코끼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받은 도움을 되갚으려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노든은 도움을 받고, 그 마음을   고이 간직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노든은 다른 동물친구들을 도와준다. 밤이면 어린 시절 코끼리에게 도움받았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며.   


코끼리 할머니가 말한 마지막 문장을 기억한다. 그게 순리라고. 혜수는 마음 표현이 서툴었던 나에게, 관대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동안 나는 계산기 두드리듯 인간관계에 너무 빠삭하게 굴었다. 기브 앤 테이크가 인간관계의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러나 조금 더 오래 살다 보니, 누군가에게 받은 마음을 당사자에게 완벽하게 되갚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마음을 받는 순간에는 충분히 고마워할 것. 그리고 꼭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에게 받은 마음을 표현하여 처음 받았던 마음을 순환시킬 것. 그리고 내가 전달한 마음은 빨리 잊어버릴 것. 그게 순리라는 코끼리 할머니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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