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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Aug 07. 2019

이제 나도 햇빛 아래로 나가보려해

소설, ‘경애의 마음’을 읽고

민호는 나보다 5살이나 많았지만, 자주 울었다. 어느 날은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울었다. 몇 년 전 이맘때, 친한 선배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는데, 죽은 선배가 좋아했던 노래를 버스에서 들었고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껴안고 한참을 바보처럼 울었다.      


민호는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진 이야기를 들려줬고, 회사를 그만두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엔 우리 관계가 조금 이르지 않나? 쉽게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민호가 묵직한 짐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은 가볍고만 싶었다. 민호의 슬픔이 내 마음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문을 꽁꽁 잠갔다. “힘내”하고 그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며.      


한 번은 내가 엄마와 퉁명스럽게 통화를 마치자 그가 말했다. 엄마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나는 버럭 화를 냈고 민호는 “그래도 어머니잖아.”라고 말을 덧붙였다. 너는 자상한 엄마 밑에서 사랑받고 자랐지만, 난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한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교과서 같은 말만 하는 그가 미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는 마음에도 권력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전교 1등이 전교 꼴등의 마음을 알 수 없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이해하긴 힘들다고 생각한다. 왜 나는 엄마와 데면데면한 지, 왜 나는 아빠 이야기는 하지 않는지 민호에게 말해도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말해도 민호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지. 나와 비슷한 슬픔을 가진 사람만 진심으로 내 마음을 알아줄 거야. 내 슬픔이 혹시나 민호에게 스며들지 않도록 잘 단속해야 했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슬픔을 키웠고 결국엔 어영부영 헤어졌다.  


소설 <경애의 마음>에서 주인공 상수는 커다란 슬픔이 켜켜이 쌓인 사람이다. 사랑을 글로 배운 상수는, 사랑이나 연애를 아드레날린과 옥시토신 등이 분비되는 ‘몸’으로 이해한다. 또는 일종의 권력관계로 생각한다. 쌍방의 착취로 끊임없이 성실과 근면을 강요하는. 하지만 상수는 또 다른 주인공 경애와 만나면서 변하게 된다. 경애와 자신이 ‘은총’이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된 공통의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아픔을 경애에게 이야기한다.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슬픔을 보여줬을 때가 떠올랐다. 중학교 때, 친구가 불쑥 자기는 아빠가 없다고 말했을 때. 그 말에 놀라 나도 아빠와 살지 않는다고 말해버렸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나왔다. 슬픔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마음이 벅차오르는 묘한 기분이었다. 그 강렬한 경험 이후, 나와 비슷한 상처가 있는 사람에게만 방문을 열었다. 거기에는 내 슬픔이 홀로 담겨 있었는데,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한 후에 그 사람의 슬픔도 내 방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방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내 슬픔의 크기도 약간 줄어들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같은 슬픔을 겪고도 무사히 살아남은 경애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에 상수가 큰 위로를 느꼈듯이, 나는 아직도 비슷한 슬픔이 비슷한 슬픔을 위로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다른 믿음도 생겼다. 내가 겪지 못한 다른 결의 슬픔을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마음도 있다는 것. 상수와 경애는 은총이라는 비슷한 슬픔에서 시작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같이 겪지 못했던 각자의 아픔을 향해 더 깊이 다가간다.      


상수는 삿포로에서 죽은 엄마의 일부터, 형이 학교 폭력을 행사한 피해자 가족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한다. 혼자서 겪은 아픔을 털어놓는다. 상수의 슬픔을 듣고 경애가 자신이 겪은 슬픔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마음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듯 오므라들었다. 상수는 깨닫는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그렇게 함께 떨어져 내린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상수의 상처가 점점 옅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인간관계도, 직장생활도 미숙했던 상수가 변해 갔다. 경애를 이해하면서, 자신의 마음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망치고 싶은 일을 회피하지 않게 된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 마음은 아마 상수를 향한 응원이 아니라 날 향한 마음이겠지.      


민호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 같다. 용기 내서 슬픔을 함께하고 같이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 은총이 헤어지면서 항상 하던 말-은총이 있으라-대로 경애와 상수 사이에는 정말 은총이 있었다. 이제 나에게도 행운을 빌어본다. 부디 은총이 있길. 아니, 은총이 없어도 괜찮다. 네가 슬픈 만큼 나도 똑같이 슬플 순 없지만, 너의 슬픔을 향해 손을 뻗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비록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계속 노력하는 마음이 우리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그때 비로소 은총이 생길 것 같다. 책을 덮고 이제 나도 햇빛 아래로 나가려 한다. 숨겨진 은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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