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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우 Dec 13. 2018

회피형 인간의 읽고 쓰는 삶

책 ‘공부 공부’를 읽고

때는 대학교 3학년, 전공 필수 과목 ‘문학의 이해’를 재수강해서 치욕스러운 D+을 지워야만 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지만, 나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알바도 해야 하고, 다른 수업 과제도 많은데 어떻게 책을 일주일에 한 권씩 읽으란 거야! 속으로 거칠게 소리쳤다.


도서관에 들락날락하며 한 학기가 흘러갈 때쯤, 교수님이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처음보다 특히 많이 달라졌다고. 쉴 틈 없이 책이 휘몰아쳤지만, 어떤 느낌을 울리며 차례대로 책이 나를 통과했다. 고시원에 사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가 지나갈 땐,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느낌을 받았다. 국가가 싫어서 일본 남쪽으로 도망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읽었을 땐,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근자감이 생겼다.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김애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문학적 취향도 생겼다. 교수님 말처럼, 내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쓰고,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구가 꿈틀거렸다.


수업을 종강한 후, 조금 심심해졌을 때쯤 친구들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임을 진행했다. 그러나 잦은 구성원들의 가입과 탈퇴로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 후엔 책을 주제로 한 콘텐츠를 만들어 사람들이 청취할 수 있는 팟캐스트를 8개월간 운영해보기도 했지만, 청취자의 피드백이 없이 혼자 고요한 아우성을 치는 느낌에 결국 그만뒀다. 뭘 해도 진득하게 오래 하지 못하는 나한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엄기호 선생님의 책 <공부 공부>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봤자 삶의 서사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성장의 기쁨을 대체하는 게 재미’라고 말한다. 어려움이 있으면 이겨내서 성장하는 드라마 같은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짧고 자극적인 재미만 추구하는 예능 같은 삶을 산다고 말했다. 뜨끔했다. 원래 나라는 인간이 그런 인간이었다. 처음엔 신나게 시작하다가,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도망쳐버리는 회피형 인간. 짧고 강렬한 ‘재미’에 집착하니, 꾸준히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게 어려웠다. 이것 찔끔, 저것 찔끔거리는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예능 같은 삶만 살게 되는 게 아닐까? 난 드라마처럼 살고 싶었다.  


재밌을 것 같아 시작된 모든 것들을 반추해봤다. 문화콘텐츠라는 전공을 선택한 것, 독서 모임, 팟캐스트, 광고 회사, 글쓰기 모임, 꽃꽂이, 필라테스까지.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독서 모임, 팟캐스트, 글쓰기 모임의 주제는 동일했다. 책, 글, 그리고 내 생각. 이것 찔끔, 저것 찔끔 비슷한 것들이 모이니 드라마 같기도 했다.


활동은 끝났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내 생각을 공유하고 싶은 욕심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재미없을 수도 있는 드라마의 어느 부분을 통과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운명처럼 만났던 한 수업이 나에게 뿌리를 내렸다. 이 뿌리가 앞으로 단단해질지, 느슨해질지는 결국 나의 몫이다. 긴 호흡으로 책, 글, 그리고 내 생각을 담은 장편의 드라마를 찔끔찔끔 끄적여 보려 한다. 어떤 결말로 끝날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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