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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저녁

by 최우



"한국인 맞으시죠?"
맥도널드에서 혼자 햄버거를 먹고 있는 사람 맞은편에 불쑥 앉아 말을 건넸다. 그가 경계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나는 미리 준비한 말을 래퍼처럼 빠르게 쏟아냈다.
"죄송한데 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안도감이 느껴 긴장이 확 풀렸다.


핸드폰을 돌려주고도 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쩌다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냐는 질문에 베네치아에서 소매치기당했다고 대답했다. 창밖에는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한 살 어렸고, 영국에서 워킹홀리데이 중이며, 로마엔 여행하려 왔다고 했다. 나는 유럽에 처음 여행 왔고, 베네치아에서 야간 기차를 타고 오늘 아침에 로마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우리 둘 다 계획이 딱히 없어서 맥도널드를 나와 로마 시내를 천천히 걸었다.


9월 로마의 저녁은 한국의 초여름 같았다. 여름밤 특유의 시원하고 간질간질한 바람이 머리를 간지럽게 만지며 스쳐 지나갔다. 길거리는 이제 막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차들의 불빛이 일렁였다. 옆을 스쳐 가는 외국인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는 귓가에 맴돌다 서서히 멀어져갔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로마의 돌길에서 나는 흙냄새와 여름밤 특유의 상쾌한 공기가 섞여 있었다.
"저게 트레비 분수대잖아요."
트레비 분수 앞에는 사진을 찍는 관광객이 모여있었다. 트레비 분수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눈동자가 가로등 불빛에 비쳐 반짝거렸다.


젤라또를 먹으면서 벤치에 앉아 잠깐 쉬는데 벌써 시간은 10시다. 이제 완전히 깜깜해진 로마는 또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로등은 부분 부분 켜져 있고 관광객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잠깐 헤매느라 어둑어둑한 골목 사이를 돌아다녔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계속 걸으니까 지압 마사지 슬리퍼를 신은 것 같았다. 그때 정적을 깨고 그가 말했다.
“내일은 뭐 하세요?”
“저는 내일 투어 때문에 아침 7시까지 로마역에 도착해야 하는데, 제가 알람 없이 새벽에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저는 내일 계획 없는데… 저도 그 투어 같이 가도 돼요?”
한국에서라면 안 쳤을 장난을 쳤다.
“와도 되죠. 근데 혼자 투어 가실 수도 있어요. 제가 늦잠 잘 수도 있거든요.”
“그럼 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의 대답을 듣고 한 번 더 장난을 쳤다.
"제가 1시에 도착해도?"
"그래도 기다릴게요."

숙소엔 11시가 넘어 겨우 도착했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많이 걸어서 다리는 시큰거렸지만, 눈은 말똥거렸다. 머릿속에는 그와 함께했던 로마의 저녁이 다시 재생되었다.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그의 대사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웅웅거렸다. 그 부분만 잘라서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벌써 새벽 3시다. 이러다가 진짜 내일 늦게 일어날 것 같아 눈을 꾹 감아봐도 머릿속에선 우리의 로마의 저녁이 다시 반복됐다. 맥도날드..로마의 길거리…트레비 분수…젤라또…올 떄까지 기다릴게요…


다음날 하루 종일 투어를 하는 동안 그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의 얼굴도 이름도 다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밤 선선한 공기가 불어올 때 가끔 그와 함께한 로마의 저녁이 떠오른다. 동시에 그날 혼자 침대에서 잠 못 자고 설레던 귀엽고 어린 내가 생각난다.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한 덕분에 내 인생에도 이런 로맨틱한 추억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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