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주말. 오전 7시밖에 안 됐는데 세탁기가 위잉 위잉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방문을 쾅 닫는다. 잠이 다시 들랑 말랑 한상태에서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무래도 내방을 청소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니 엄마!! 주말에는 좀 늦게까지 자고 싶으니까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를 꽥 지르니까 엄마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간다.
주말엔 거의 누워있는다. 유튜브 보다가, 배고프면 냉장고 문을 열어서 뒤적거리다가, TV 리모컨을 기계적으로 돌린다.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려도 가만히 누워있는다. 엄마가 빨래를 말리려 베란다 문을 끼익 여는 소리가 들려도 계속 누워있는다. 하지만 그래도 엄마는 나에게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왜냐? 내가 바로 이 집의 가장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이직하면서 2년 반의 자취 생활을 끝내고 다시 엄마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달 뒤 엄마는 30년 동안 운영하던 미용실을 그만두었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엄마는 저축이라는 게 뭔지 모르는지, 정말 한 푼도 없다고 했다. 우선 당장 내가 이 집의 월세와 공과금부터 내야 했다. 월급을 아껴서 저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월세를 내야 하는 날이면, 엄마는 거의 구걸하듯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일까지 월세 내야 되니까 좀 보내줘...' 그러면 나는 안읽씹 했다. 그렇게라도 반항하고 싶었다. 엄마가 고춧가루 산다고 10만 원을 달라고 말하는 날, 치과 치료를 해야 한다고 30만 원을 보태달라고 말하는 날에 나는 더 기고만장했다. 그럴수록 엄마는 고분고분해졌다. 자연스레 나는 엄마가 혼자 집안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설거지를 해라, 분리수거를 해라.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 되어버린 듯했다.
어느 날은, 우리 집 사정에 대해서 친구에게 하소연하다가 그저 웃기려고 말했다.
"나 지금 가장이잖아. 생활비를 내가 다 내니까 집안일 진짜 하나도 안 해."
친구도 웃으면서 말했다.
"와, 언니 근데 약간 한남이네."
나 정말 한남이 되어버렸다고, 웃으면서 넘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나는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한국 남자'의 표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회적 활동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업 주부가 된 아내의 가사활동을 멸시하고, 아내의 가사활동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는 '한국 남자' 말이다.
물론 엄마와 나는 부부는 아니지만, 어쩐지 지금은 모녀관계보다는 부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남편 쪽에 가까웠다. 엄마는 나에게 생활비를 받는 '아내'고, 나는 생활비를 버는 '남편'. 그건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집에 막 들어왔을 때 엄마가 친구와 전화하는 내용을 얼핏 들었다.
"에휴 딸인지, 남편인지 모르겠다니까..."
못 들은 척했지만 남편 역할을 하는 나는 어쩐지 좋은 남편은 아닌 것 같았다.
페미니즘이 주요 이슈로 부상하면서 많은걸 듣고 배웠다. 한국 남자는 왜 모르는지 답답했다. 전업 주부를 '맘충'이라고 조롱하고, 육아로 인해 경력단절을 겪어 경제력을 상실한 아내를, 사회활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중하지 않는 사례를 여럿 보았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 모든 생활비가 오로지 내가 버는 월급에서 충당되니, 나는 나도 모르게 한남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한남이 되기는 쉽다. 나는 내 가치를 인정받아 회사에서 받는 사회적 월급이 있지만, 집 안에서 은밀히 이루어지는 가사 활동은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다. 가사 활동의 노동과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있다면 어떨까? 만약 엄마가 시간당 가사 활동시간을 계산하여 나에게 세금계산서를 발행을 하고, 내가 엄마의 계좌에 입금하는 구조가 된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은 엄마의 이마에 이런 문구가 계속 써붙여져 있다면 어떨까? “너는 고작 몇 달, 가장 노릇 한다고 그렇게 생색을 내냐. 이 애미는 20년 동안 아빠 없이 너 키우느라 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