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K pop Critic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C 워너비 Jul 08. 2024

'푸른 산호초'에 대한 리액션

더 열린 세상을 원하는 민희진의 욕망

뉴진스 멤버 하니가 도쿄돔에서 부른 '푸른 산호초'가 화제가 되었지만, 이 무대는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큰 메아리를 일으킨 것 같다. "열도가 뉴진스에 열광한다"는 전언에 고무돼 관심을 부르고 파생 뉴스가 증식했다. 외국 가수가 방문해 자국의 국민가요를 따라 부른 것이 현지에서 화젯거리 이상의 의미 있는 뉴스가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국에선 노래와 노래의 주인 마츠다 세이코가 소개되면서 ‘푸른 산호초’ 자체가 새로운 화젯거리로 작용했다. 마츠다 세이코를 소개하고 무대를 커버한 하니의 모습과 맵시를 맞춰 보는 쇼츠 영상이 쏟아졌다. 배우 지예은이 서울 워터밤에서 하니처럼 복장을 꾸미고 ‘푸른 산호초’ 무대를 재연한 장면은 그 전형적 사례다. 이 점이 고취된 국가주의적 자부심과 어울려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것 같다.     


이건 기획을 잘한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뉴진스의 일본 데뷔가 마냥 성공적인 건 아니지만, 한일 양국 여론이 상호 작용하며 마케팅의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뉴진스의 일본 데뷔 싱글은 한국에서 동시 발매했다. 가사 역시 일본어 가사는 곁들이는 느낌이고, 영어와 한국어 가사가 많다. 한국을 중심으로 글로벌 시장을 함께 공략하는 의도다. 의도된 대로 한국에서 더 반응이 좋고 글로벌하게 바이럴 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 활동을 이런 식으로 기획한 전례는 없었다. 새로운 노선을 제시한 건데, 장기적으로 효과가 어떨지는 지켜봐야 한다. 외국 현지 시장과 한국 내수 시장을 연동하는 전략이고, 대중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점을 둔 전략이다. 뒤집으면 '현지 시장'과 '팬덤 공략'이란 키워드는 흐릿하다. 다른 케이팝 그룹은 현지 맞춤형 활동을 하는데, 일본어 가사가 적은 노래로 얼마나 일본 팬들 마음을 깊이 팔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일본 활동을 현지에 국한된 활동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활동으로 끌어올리겠다는 비전이 엿보이지만, 그런 만큼 로컬 시장을 공략하는 활동으로선 최적화되진 않은 해법이다.     


뉴진스 데뷔 싱글 오리콘 초동 기록은 3만 8천 장 정도로 결코 많이 팔린 게 아니다. 7년 전 트와이스는 일본 데뷔 싱글 초동 판매량 10만 장이 넘었고, 5년 전 아이즈원은 22만 장이 넘었고, 작년 르세라핌도 23만 장 정도 팔았다. 아이브의 ‘WAVE’도 9만 장 정도 된다. 뉴진스는 ‘푸른 산호초’, 도쿄돔 같은 신드롬스러운 키워드에 비해 의아할 만큼 판매고가 적다. 케이팝 신을 잘 모르는 '대중'은 뉴진스 일본 앨범 판매량이 이 정도밖에 안 될 거라곤 상상을 못 하고 있을 것 같다. 이건 아마 의도된 착시 같다. 일본 앨범을 한국에서 동시 발매해 한국 시장 및 글로벌 시장에 별도로 판매하고 있다. 4만 장 밖에 안 되는 오리콘 판매량은 보도되지 않고, "오리콘 1위"라는 순위만 뉴스 헤드라인에 뜬다. 한국에서 발매한 앨범 판매량 70만 장이 그 대신 홍보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뉴진스가 일본에서 판 음반 숫자가 70만 장이라고 오해하기 마련이다.     


뉴진스는 일본에서 '대중적 화제성'에 비해 음반을 사는 코어 팬덤이 세지 않은 것 같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코어 팬덤이란 존재에 거리감을 두는 행보를 취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 개인의 기질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민희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케이팝 고인 물들을 "망령"이라고까지 일컬으며 혐오감에 가까운 염증을 피력해 왔다. 그 성향이 오프 현장에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홈마스터’들을 탄압하고 그룹을 팔로우하는 '시녀'들을 배격하는 그룹 운영으로 발현되어 왔다. 어쩌면 그는 한정된 소비자들의 지갑을 쥐어짜며 그 안에 고이게 되는 양상의 문화가 세련되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흘겨보는 것 같다. 반면, 더 열린 세상을 누비고 흘러가며 트렌드를 선도하는 역할에 매력과 갈증을 느끼는 걸 지도 모른다. 그의 출신이 마케터나 기획자가 아니라 동시대 미적 취향의 동향을 수집해서 표현하는 비주얼 디렉터란 걸 떠올리면 그게 사실일 지도 모른다.     


그 열린 세상은 팬덤 시장에 대한 대중 시장이며, 일본과 한국 등 로컬 시장에 대한 글로벌 시장이다. 뉴진스는 올해 컴백 전까지, 코어 팬덤을 등지는 방식의 운영 때문에 국내에서 여성 팬-코어 팬이 이탈하고 있다는 관측이 많았다. 주요 홈마스터들이 운영에 불만을 표하며 공개적으로 입장문을 쓰고 계정을 폐쇄한 적이 여러 차례다. 하지만, 하이브와의 내전을 거치며 그 상황이 덮였고, 다른 하이브 그룹 팬덤을 뺀 나머지 케이팝 팬덤의 지지를 얻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그럼에도 이번 일본 활동에서 알 수 있듯 민희진의 운영 방식이 바뀐 것은 없다. 현 상황이 코어 팬덤 재유입으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짚고 싶은 건 ‘푸른 산호초’를 '영접'하는 어떤 이들의 태도다. 이들은 뉴진스 보다는 민희진의 지지자처럼 보이며 그가 빚은 피조물로서의 뉴진스를 예찬한다. ‘푸른 산호초’ 연행 후에도 넷 상에선 과장되고 망령된 말의 성찬이 넘쳐 났다. ‘민희진이 케이팝과 제이팝의 경계를 없앴다’ 거나 ‘민희진이 ’ 푸른 산호초‘를 선점하며 원본의 자리를 차지했다’ 따위의 말들이 SNS에서 어마어마한 횟수로 공유되었다. 어떠한 재해석 없이 의상 하나하나까지 원곡 가수를 따라한 제이팝 커버 무대를 가지고 저런 말들을 뱉는 건 해도 너무 했다. 이런 사람들이 취해 있는 대상은 뉴진스는 물론 민희진 조차 아닐 것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특별한 것을 알아보는 ‘나’의 눈썰미에 취해 있는 것이고, 민희진의 예술 세계가 특별하다고 주문을 외우면 그것을 사랑하는 자신 역시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저명한 케이팝 평론가 김영대가 트위터에 쓴 글을 보자.     


민희진은 케이팝이 오랜 세월 간절히 도달하고자 한 궁극의 지점을 뉴진스를 통해 실험하고 완성하는 중이다. 시간도 공간도 맥락도 없는, 하지만 모든 이들의 머리와 감성 속에 공유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모더니티 그 자체. 아무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절대적인 호환성. 그런데 그걸 기술이나 시스템이 아니라 미학의 관점에서 완성하니 더없이 대단한 것. 그것도 누구나 알기 쉬운 방식으로.


민희진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모더니티"의 구현자라고 선언하거나 이런저런 최상급의 찬사를 바치는 건 어떤 문맥에서든 개인의 자유에 속할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그게 "시간도 공간도 맥락도 없는" 무엇으로 보이는 걸까. 뉴진스는 구체적 레퍼런스가 많은 그룹이고, 가장 큰 비중은 팔구십 년대 일본문화를 모사한 "모더니티"에 있다. 그것들을 2020년대 한국에 끌고 오니 "시간과 공간"이 뒤섞여 보이는 것이다. 도대체가 ‘푸른 산호초’라는 유명한 일본 노래를 커버한 무대에 왜 이토록 웅장한 단어들이 동원돼야 하는 것일까. 비평의 대상에 애정을 갖는 것과 비평의 대상을 부풀리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는 애정에 상응하는 밝은 눈과 세심함이 있어야 성립하고 후자는 그런 게 필요가 없다. "궁극의 지점" "절대적인 호환성"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모더니티 그 자체" "더없이 대단한 것" 같은 성찰 없는 상투어를 남발하면 끝이다.     


한편으론, 자신들이 품은 향수, 그러니까 자기 세대 취향의 기원을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모더니티"로 정초 하고 싶은 ‘영포티’ 혹은 '영피프티'의 욕망이 참 정직하고 담대하달까. '푸른 산호초'에 열광하는 한국의 '리액션' 안에 숨어 있는 어떤 욕망들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진된 과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