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피, 인도
인도 여행도 익숙해져 매너리즘에 빠져있을 때즈음 남인도로 떠났다. 그곳에선 여행의 감흥이 다시 고취될까 반신반의하면서.
남인도를 가고 싶은 이유는 바로 지금 가는 함피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여행작가의 책에서 본 함피의 풍경은 사진으로 봐도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한국을 떠나기전부터 이곳에 꼭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북인도에서 남인도로 내려가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한 번에 가는 기차와 버스가 없어서 1박 2일에 거쳐 야간 침대 버스를 비롯한 여러 대의 버스를 나눠 타야 했다. 씻지 못해 겉모습은 점점 꼬질꼬질해졌고 제대로 된 침대에 누워 자지 못해 정신은 몽롱해져 갔다. 고대하는 함피를 가는 길은 쉽지 않구나.
함피에 도착하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랐다. 일단 북인도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커다랗고 길쭉한 야자수가 곳곳에 풍경을 장식했다. 벌써부터 이국적인 풍경에 설렜다.
조금 더 가자 흙더미 속에 바위라고 부를만한 돌들이 쌓여 있었고 황량한 길바닥 위에 드문드문 신전 같이 생긴 건축물이 서 있었다. 신비스러운 느낌을 더해주었다. 공기도 조금 더 여유롭고 느긋해진 기분이 들었다. 북인도를 떠났을 때 차분했던 마음이 드디어 들뜨기 시작했다.
함피 곳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가 놓여있었는데 무척이나 새로웠다. 이 돌무더기 유적은 소박하면서도 웅장했다. 별것 없는 별거 아닌 돌들이 모여 커다란 산을 이루고 하나의 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기이했다.
오래된 유적이 주는 신성함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많은 돌들이 주는 묵중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함피의 신비스럽고 묘한 분위기에 사로잡혔다.
남인도에 오니 여행객 자체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한국 음식을 파는 식당도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인도를 느낄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사실 남인도를 여행할수록 북인도와 다른 정취와 감성에 때로 인도 같지 않다,라는 생각도 했다. 판공초를 여행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인도’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사람과 차량으로 가득 찬 델리의 복잡한 거리나 순백의 고고한 타지마할 정도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면적이 큰 나라를 여행하면 그 나라의 다채로움에 놀란다. 지역에 따라 풍경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와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다.
가장 놀랐던 건 얼굴의 생김새였다. 단일 민족인 우리나라와 달리 여러 소수 민족이나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같은 나라로 묶여 있어도 서로의 정체성은 또 다르다.
가끔 내가 다녀온 여행 사진을 친구들이 볼 때 놀라곤 한다. 중국에 이런 풍경이 있는지 몰랐어, 인도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나도 한 번 가보고 싶어 진다. 이런 나라는 주로 아시아 국가로 관광지가 저평가된 나라다.
내가 아는 인도는 사실 교과서나 미디어에 의해 흔히 보인 인도이다. ‘진짜 인도’가 있고 ‘인도 같지 인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게 인도다. 그리고 과연 이 사실이 풍경에만 적용될까?
함피를 온몸으로 느끼고 누렸다.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다 숙소 뒤편의 개구멍을 발견했다. 정말 우리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런 흔한 개구멍. 몸을 구겨야만 겨우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이었다.
그곳은 꼭 차원의 문 같았다. 다른 여행자들은 모르는 장소. 한적한 강이 흘렀고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보였다. 게다가 널찍한 바위도 있어 앉거나 누워서 이 모든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고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함피에서 돌아다니는 말이 있다.
“Don’t worry, Be Hampi”
걱정하지 마 여긴 함피니까.
실제로 함피는 나의 기분을 굉장히 물렁물렁하게 했다. 몽롱한 기분에 잠겼다. 왠지 과거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 현재의 고민을 잊게 해 주는 곳.
풍경에 취해있던 나를 깨운 건 한 마리의 새끼 강아지였다. 심장이 쥐어터질듯한 귀여운 아 강아지는 말 그대로 똥꼬 발랄하게 내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꼬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니 현지인 할아버지는 강아지가 익숙한 듯 한 번 만져보라며 강아지를 잡아주었다. 사람을 무서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얌전하게 쓰다듬을 받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눈을 뜨기만 하면 나만의 시크릿 장소로 향했다.
다른 무늬의 새끼 강아지 한 마리가 더 있었고 그 둘이 서로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여기가 지상낙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은 새카만 얼굴의 어린아이까지 나타났다. 강아지를 붙잡아주었던 현지인 할아버지의 손자인 듯했다.
그 아이는 친구도 다른 장난감도 없이 새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풍경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데 강아지들과 무해한 어린아이까지. 세 가지가 한 번에 있을 수 있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이의 이름은 뽐빠뿌디였다. 숙소 근처 식당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뽐빠뿌띠는 시바 신의 여러 이름 중 하나라고 했다. 뽐빠뿌띠가 궁금했다. 함피에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 형제자매는 없는지, 저 남자는 너희 아빠인 건지 할아버지인 건지. 사실 그다지 좋은 질문들은 아니지만 말이다.
함피의 비밀 아지트, 사실 그들의 공간에 갔을 때마다 아이는 금세 나타났다. 소작농인듯한 할아버지가 때로 땅을 메고 밭을 갈구었다. 그때마다 뽐빠뿌디는 옆에서 심심한 듯이 새총으로 장난을 쳤다.
아이와 할아버지는 현지어만 구사해 그들과의 완전한 소통은 어려웠다. 우리는 눈빛과 바디랭귀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서로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괜히 더 애틋하게 만들었다.
눈 앞에 존재하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서로 다른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서로가 하는 말을 못 알아 들을 뿐 아닌 서로가 어떤 세상에서 어떤 생활 방식으로 사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들의 몸짓과 비언어적인 음성을 통해 그들 말과 함께 보이는 삶 너머를 추측하고 상상했다.
함피를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뽐빠뿌띠와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강아지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미워졌다. 고새 정이 들었나. 영화 같았던 풍경을 목격하고 그 풍경의 일부가 되었던 나. 그게 행복했던 거다. 함께하는 동안에도 믿기지 않았고 말도 안 되게 행복했다.
떠나기 전 뽐빠뿌띠와의 추억을 무엇으로 마무리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장난감을 선물하기로 했다. 다행히 근처 상가에서 아이들 장난감을 팔았다. 고민 끝에 적당한 크기의 공과 버스 모형을 골랐다. 뽐빠뿌띠가 먹을 간식은 덤으로.
뽐빠뿌띠가 선물을 아주 좋아할 거라는 상상과 달리 덤으로 준 과자에만 관심을 보였다. 나의 정성과는 상관없이 과자봉지를 바로 뜯어 즐겁게 먹는 뽐빠뿌띠. 넌 역시 쉽지 않은 남자임에 분명해. 아련한 인사를 그들에게 남기고 떠날 채비를 했다.
함피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마팅가 힐에 올랐고 함피에서 가장 좋아하는 식당엘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이보다 더 완벽한 시간은 없었지만 이 아름다운 모든 것을 두고 떠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버스 스탠드에서 몸만한 배낭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이트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함피 사람인지, 근처에 젊은 인도 청년 둘도 함께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When you coma back Hampi? next year?“
“함피 언제 다시 올 거야? 내년에?”
다음에 꼭 다시 찾으리란 다짐을 했지만 나 또한 그것이 기약 없다는 걸 알았고, 내년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을 알아 씁쓸하고 아쉬운 표정으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No…next year will be difficult.“
“아니 내년에는 어려울 것 같아”
그랬더니 또다시 한 청년이 기다린 듯이 말을 건넸다.
“Then next life?”
“그럼 다음 생에?”
그의 가벼운 농담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일 년이 흐르고 이 년이 흐르고, 현실에 치여 매번 언제 인도를 다시 찾을까, 생각만 하고 미루고 미루다 결국 이 나라를 영원히 방문하지 못할 거라는 진실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인도에 오는 것보다 오지 않는 편이, 그렇게 흘러가는 상황이 더 수월하니까.
그가 장난처럼 던진 말에 나는 꼭 다짐했다. 다음 생에 인도를 방문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을 확인하듯 뒷꿈치를 띄워 양손으로 두 어깨에 달린 배낭끈을 이영차 잡아당기고 고아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