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사리분별 능력이 미약한, 떼쓰기의 세계에 본격 진입한 만 2세 전후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키보드를 치는 손가락이 벌써부터 파르르 떨린다. 떼쓰는 아이 때문에 심신이 지친 부모님들에게 이 글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 이 무렵 아이가 떼를 쓰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이므로, 이 글은 만 2세 전후 아이를 둔 대부분의 부모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오후 4시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뒤 집에 돌아오면 전쟁이 시작된다. 아이는 늘 벼랑 끝 전술을 쓴다. 우유를 마시고 싶으면 "우유 주세요"라고 말한 뒤 기다리면 될 텐데, 아이는 30초를 채 기다리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얼마 전부터는 우유를 꼭 전자레인지로 데워야만 먹는다. 전자레인지로 우유를 데우는 동안 "우유 주세요"는 "우유 줘"로 바뀐다. 목소리는 점차 커진다. 내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진다. 그렇다고 조금만 데워서 주면 다시 "차가워" "데워줘"하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진퇴양난이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타일러봐도 소용이 없다. 투우사가 황소와 대결을 벌이는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눈이 돌아간 황소에게 "너 지금 화낼 때가 아니야"하다가는 목숨이 위태롭다. 윽박지르는 건 더욱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가능한 선택지는 결연히 맞서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아이를 두고 달아날 순 없으므로(마음으로는 그러고 싶겠지만) 결국 남는 건 정면승부뿐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가 떼쓰기를 시작한 이후로 나의 대처법은 줄곧 정공법이었다. 우유 주기를 예로 들자면, 우유를 줘도 된다고 정한 시간에는 주고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주지 않았다. 아주 단순하다. 문제는 아이가 떼를 쓸 때다. "지금은 새벽이라서 안 돼" "밥 먹기 직전이라 안 돼" 이렇게 설명을 하고 이미 정한 원칙을 최대한 관철하려 했다. 우유를 데우는 시간 동안 아이가 떼를 쓰면 "우유 데우는 데 시간이 걸리니까 기다리자"라고 말해줬다. 그 결과는? 아이의 떼쓰기는 점점 심해졌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닌가' '이대로 괜찮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아이가 떼쓰기를 멈춘 건 우연이었다. 작심하고 해법을 준비한 건 아니었다. 작은 변화였을 뿐인데, 아이는 거짓말처럼 투정 부리기를 멈추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말을 하나하나 귀담아들으면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잠깐이었지만, 마치 육아계의 코페르니쿠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뭘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데, 내 해법은 '흥얼거리며 이야기하기'였다. 이를테면 새하얀 우유 왕자가 전자레인지 아줌마의 댄스장에서 신나게 춤을 춘 뒤 따뜻하게 데워져 얌전히 잘 기다린 아이를 향해 훨훨 날아가는 이야기를 콧노래를 부르며 해주는 것이다. 아이가 평소처럼 "우유 주세요. 데워주세요"하고 떼를 쓴 어느 날이었다. 이날은 희한하게도 사무적인 목소리로 "기다려. 데워줄게"라고 하지 않고 "차가운 우유를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멜로디를 넣어서 뮤지컬 배우처럼 말했다. 육아 스트레스에 잠시 머리가 이상해졌던 것 같다.(다들 자주 그렇게 되지 않나?) 그러자 아이가 일순간 칭얼거리기를 멈추고 날 쳐다봤다.
"전자레인지 아줌마가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네~ 새하얀 우유 왕자님 어서 이리 와 여기서 춤을 추렴~ 우유와 전자레인지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네~"하고 반쯤 미친 사람처럼 노래를 부르자 아이는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덩달아 신이 나서 "따뜻하고 맛있는 우유가 띠용~"라고 외친 뒤 아이에게 갖다 줬다.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는 아이를 향해 "짜증 내지 않아도 돼. 아빠는 늘 듣고 있어"라고 말했다.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이는 나의 눈을 쳐다보며 우유를 꿀꺽꿀꺽 마셨다.
아이가 더 크면 아마 이렇게 할 순 없을 것이다. 갑자기 아빠가 노래를 부르면 아이는 질색을 하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본질은 '아이에게 노래 부르듯 말하면 된다'는 게 아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아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여부다. 우리 집 아이는 이야기와 노래를 좋아한다. 이야기와 노래를 겹친 뮤지컬 방식의 말하기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평소에 노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흥얼거리며 노는 걸 좋아하고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다는 걸 알기에 할 수 있던 행동이었다.
요리할 때, 빨래한 옷가지를 건조대에 널 때, 목욕할 때 등의 시간마다 아이에게 흥얼거리며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설명이 아니라 이야기를. 아이는 조금 서툴지만 요리 재료 손질을 신나게 돕기 시작했고, 건조대 제일 아래줄에 빨래를 (구깃구깃하게) 널고, 목욕시간이 되면 도망가지 않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잡고 함께 욕실에 들어간다.
'이걸 좋아하던데,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에 우연히 해본 시도에 아이의 떼쓰기가 멈추는 걸 경험했다. 아이와 아빠 모두 어제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날이었다. 서로를 향해 긴장하고 대치하던 상태에서 마치 함께 춤을 추듯 어우러졌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대단한 일처럼 부풀려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가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아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아이는 자주 떼를 쓴다. 아이가 떼를 쓰지 않는 획기적인 방법을 찾았다면, 아마 노벨 육아상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아이의 세계에 나를 포개어 가는 경험은 놀라운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전에 상상한 적 없던 일을 시도할 때 아이는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아이 안에 하나의 씨앗처럼 잠재돼 있던 가능성은 부모의 사랑과 노력을 만나 싹을 틔우는 것 같다. 이건 용기를 내어 시도해보지 않으면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