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는 인문학의 힘.
인문학의 역할론에 대한 물음은 여태껏 그 정체성에 대한 질문 한 쪽에 덧붙여져 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진석 문학평론가의 얘기처럼 인문학에 대한 본질적 물음은 그것이 근대 학문의 학제로 자리 잡았을 때부터 이어졌고, 역할론 역시 1990년대 중반 학계에서 ‘인문학의 위기’라고 일컬었던 시기를 지나 “인문학이라는 이름은 같지만 생태는 전혀 달랐던 대중적 문화”, 즉 인문학이라는 ‘문화’가 대중매체와 여러 채널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외피만 달리한 채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인문학에 정답이 정해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건 안 봐도 되니 한 번에 정리·요약해 주겠다는 인문학 문화가 스스로의 역할을 가두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이는 소통의 방식을 택했다기보다는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확하지 않은 격려 같다고 느낍니다. “박제된 인문학” 앞에서 관람하는 우리들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면, 이제 인문학이 말하는 “불화”를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인문학은 그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보다, 인문학을 무엇이라 정의하는 조건에 대한 사유이자 성찰, 인식이 되어야 한다.(…) 인문학이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이나 본질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는 개신과 변화에 스스로를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불화를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이다.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모토에 강박되어 한낱 처세술로 전락하는 인문학, 다수의 편익과 이해관계에 예속된 채 소수의 권리와 생존을 못본 척 외면하는 인문학, 전문성과 권위를 빌미로 세상과 세인을 기만하는 인문학, 무엇보다도 현재의 자리에 안주하여 더 나아갈 꿈을 꾸지 못한 채 박제가 된 인문학.
인문학은 이 모든 인문학의 그림자들에 저항하며 싸워야 한다. 대중과의 소통이 화두가 된 이래, 인문학은 대중성을 담지하고자 항상 노력해 왔으며 그것이 앎의 개방과 확산, 평등한 분배라는 큰 목표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화할 줄 알아야 한다. 불화는 소통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대중과 화기애애하게 덕담이나 주고받는 데서 만족할 게 아니라, 그들과 다투고 논쟁하며 반목함으로써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블화를 인문학의 새로운 쟁점으로 제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_최진석, 「불화의 인문학을 위하여」
김희진, 「유행에 얽매이지 않고 인문학책을 읽고 쓰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20여 년간 인문, 사회, 교양 도서를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어느 책 한 권의 학술적 단단함과 엄밀함은 개인적인 능력이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 사회구조의 문제, 역사의 문제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야겠다.”
“그러니 쉽고 재미있는 인문학 강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더 깊은 공부로 이끌지 않는(심지어 이것만 보면 되고 더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유혹하는) 생산, 유통, 수용 과정이 문제다. 공부는 계속해서 공부로 이끄는 것이 자연스럽고 모든 공부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선생을 만나도 소용이 없다. 이것이 책 본연의 역할이기도 하다. 공부에 책만큼 효율적이고 민주적인 매체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친밀한 관계나 종교나 인문학은 다른 능력과 함께 모두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능력을 요구한다. 이를테면 ‘기도’란 내가 지금 객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단독자가 나에게 원하는 것(신이 내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살피는 행위이다. 인문학 텍스트도 다른 어떤 텍스트보다도 쓰기와 읽기에서 기도를 닮은 이런 능력을 요한다. 인문학 공부는 궁극적으
로는 인류 역사상 특별히 더 깊고 정교한 정신의 산물들을 음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텍스트와의 이런 깊고 내밀한 만남(독대)은 외부 안테나를 끄고 내부 안테나를 켠 상태에서 가능하다.”
“지금 나의 삶과 연결된 진지한 고민이 인문학책들을 읽어나가기 위한 문해력(리터러시)의 기반이 된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시간들이었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다른 대안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목적에 대해서도 숙고해야 한다... 정신이 자유롭고 자율적이도록, 다른 대안에도 눈을 열어 운명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엄밀함만큼이나 내 삶과 연결된 질문으로 끌어당기는 데에도 노력을 들여야 할 때가 아닌가?”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고루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진다.”_논어, 위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