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을 읽고.
소셜 네트워크나 이를 기반으로 한 모임 등에서 심심치 않게 ‘취향의 공동체’라는 말을 듣는다. 단순히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사실 이상으로 그들에게 소속감이나 인정욕구 등을 부여하는 집단의 개념이다. 이 집단의 특성은 취향이 곧 정체성의 다른 말이 되는 시대의 경향과 맞닿아있다(장강명, 「취향의 공동체」, 한국일보, 2017년 7월 13일.).
혈연이나 학연처럼 애초에 선택할 수 없거나 집단을 우선적으로 경유하여 그 안의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와는 확연히 다른데, 취향 공동체는 ‘같음’을 기꺼이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라는 제목의 곡이 있듯 우리의 인력이 ‘다름’ 앞에서 작용할 수 있겠지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건 분명 어느 정도의 동일성 혹은 동질감이고, 사실 이 자장 안에서의 변화만을 우리는 기꺼워한다. 한병철은 이를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이하 인용구는 별도로 표기한 것을 제외하고 모두 한병철의 저서에서 비롯됐다.)라고 말한다.
같은 취향의 사람들이 모이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자연스러움을 조금씩 잃고 있다. 취향부터 신념까지 다른 타자와 대면하는 자연스러움이다. 타자를 우연히 마주친다. 그에게서 다름을 느끼고, 그것이 어색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앞으로는 그를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다. 이유는 명확하다. 쓸모없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거나 그 시간에 자신과 말이 잘 통하고 생각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게 더 좋은(생산력 있는) 선택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이라면 관계를 정리하기가 좀 번거로울 수 있겠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간단하다. 그를 ‘뮤트(Mute)’하면 더 이상 눈에 거슬리거나 신경에 건드리는 일이 없어진다. 내 앞의 타자를 소거해버리는 방식. 이로써 안정감을 되찾고 비슷한 취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세계에 다시 진입한다. “같은 것은 고통을 주지 않는다.” 그건 나의 자연스러움이나 자기다움을 확인시켜주는 수단이 된다. 이때 우리가 획득하는 자연스러움은 습관으로서의 자연스러움이다(황현산).
동시에 타자와 맞닥뜨리는 자연스러움은 관계의 습성에서 흐릿해지기에 이른다. 이렇게 우리 곁의 타자는 추방된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타자의 곁에서 추방시킨다. 다른 것에 대한 경험의 축소는 곧 우리가 겪어내는 세계의 축소다. 작아지는 세계 속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면서 우리는 자신과 동일성에 대한 애착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자아는 비로소 어떤 간섭도 없이 홀로서기에 성공하는가?
끊임없이 긍정을 주입하는 사회가 있다. 이 사회는 개인을 긍정하기보다는 방식을 긍정한다. 개인은 개인이기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된 방식을 택한다. 나를 만드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취득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허용되고 긍정된 방식만이 존재한다. 부정됨으로써 재고하고, 재고함으로써 다른 방향을 생각하는 길목이 막힌다. 길목이 막히는 건 경화이다. 경화는 비대함를 유발한다. ‘긍정된 방식’의 자아는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경화되는 동시에 비대해진다.
비대함은 의존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의 기세와는 상관없이 비대를 뒷받침 할 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소외시킨 자아는 자신의 안정성을 입증하기 위해 계속해서 비교군을 설정한다. 축소된 세상에서 자신의 비대함으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좁아지면 기댈 구석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주변을 곁눈질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개인의 서사는 ‘진정성’으로 넘어간다. 진정성은 외부에서 정해진 표현과 태도의 틀에서 자유롭고, 자기 자신과만 같으며 자신을 통해서만 자신을 정의한다. (남과 다름이 아닌) 자신이 자신과 같다는 진정성은 시장이 채택한 수사학이자 “판매 논리”가 된다.
신자유주의적 생산 전략으로서 진정성은 상품화할 수 있는 차이들을 산출한다. 이를 통해 진정성은 자신을 물질화하는 상품들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 개인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무엇보다 소비를 통해 표현한다.
소비를 통해 획득한 진정성은 결국 다시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다. 내가 쓰는 물건이 나를 대변하는 간편함은 결국 자신에 대해 발언해줄만한 더 많은 소비로 이어지고, 여기서 결국 단독자들이 가지는 선택지는 다름이 아니라 같음에 가까워진다.
소비한 가치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역시 생산이 가진 ‘진정성’을 고민하는 방향이 아니라 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들어지는 걸 소비하는 방식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구매된 취향은 그 자신의 간편함을 넘어 타인에 대한 호오마저 삼켜버린다.
(실존주의가 아닌) ‘싫존주의’라는 신조어는 부정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불호 표명과 타인의 혐오에 대한 정당화 사이에서 한국 사회가 처한 딜레마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취향화된 혐오는 오늘날 사회 구성원이 함께 머리 맞대며 지켜나가야 할 사회의 기본 가치를 ‘미감’의 차원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 억눌림 당해온 이들의 정의 어린 호소를 ‘구린 감각’으로 쉬이 판단된다.(김신식, [다소 곤란한 감정], 프시케의숲, 2020.)
여기에는 타인을 대면해 대화를 나누면서 그를 이해하거나 인정하려는 시도들이 생략되어있다. 그저 타인은 판단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상관성을 조사하는 빅데이터는 흔히 얘기하는 ‘알고리즘’과 맞닿아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의지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킨다. 가령 유튜브에서 ‘알고리즘 타고 왔습니다.’라고 댓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그걸 검색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다. 알고리즘을 파도 타듯 따라가는 건 발견이 아니라 추적에 가깝다. 추적의 지형을 제공하는 건 다수의 이용자이고, 알고리즘은 그 안에서 어떤 인과관계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를 축적하고 제시하여 ‘다름’에 대한 가능성을 부순다.
몇 가지를 검색해서 찾아보면 다음에는 관련된 사항을 보고 싶지 않아도 우후죽순 그에 대한 정보를 발견할 수 있다. 다른 것으로 나아가거나 넘어갈 가능성은 이런 과잉정보에 파묻히고 만다. 과잉정보는 모든 걸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너무 가까워진 정보들이 수용자를 무기력에 빠지게 하고 어떤 사건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킨다.
또한 이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행위자로 착각하는데, 큰 스피커를 지닌 소위 ‘인플루언서’ 앞에서 소통이 같은 층위에서 이뤄진다고 이야기하는 건 오판이다. 이런 동일시의 착각과 불균형은 타자와의 거리는 무화되면서 투명해지기에 이른다. 서로를 소외시키는 동시에 상대와의 거리는 밀접해있고, 모든 것과 연결되어있으나 연결의 주체는 텅 빈 상태가 되는 것이다.
같은 것들 속에서 정체되어있는 상황에 대해 한병철은 사유를 언급한다. 사유는 사건성과 더불어 다른 것으로의 진입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그가 피로사회에서 언급한 사색과 궤를 같이한다. 사색은 충동적이거나 지적인 행동 모두를 불러일으킨다. 선택에 관련한 일과 계획하지 않았던 일 모두 사색의 결과가 된다. 생산성을 배제함으로써 벌어지는 사유와 사색은 사회의 무책임한 긍정을 부정하면서 시작된다. 또한 그는 경청을 능동적인 행동으로 정의한다.
경청은 다름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타인이 말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성도 있는데, 사회가 부여하는 고통의 범주를 은폐하고 그것을 개인에게 돌리는 방식 자체를 들춘다. 즉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의 정치성은 통각과도 관련이 있다. 고통은 당연히 아픔이고 아픔은 통증이다. 어떤 통증은 학습된다. 타인의 고통을 기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신형철).
근본적으로 무감함이나 둔감함은 그것이 내 범주 안의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면서 성립된다. 경청은 나의 범주 안으로 완전히 다른 것을 들여오는 것을 넘어서서 경계너머로 건너가는 행위이다. 여기서 타자와 공동체의 의미는 복권된다.
한병철은 공동체를 경청하는 집단으로 규정하고 친근함과 경청이 공동체의 형성조건으로 본다. 취향의 공동체가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혈연이나 학연 등의 공동체와 비교했을 때 개방이 가능하고 확장이 용이하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용기를 내 시선을 조금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에서부터 타자에 대한 환대가 시작된다.
또한 피드백 운동이 지닌 역동성을 이런 공동체가 지닐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런 피드백이 더 많은 사람을 환대하는 방향으로 펼쳐진다면 취향의 공동체는 미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환대를 통해 사회는 능동적으로 유지된다. 사회구성원이 서로를 인정하고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일이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 환대가 이론적인 뒷받침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신분제 철폐, 천부인권 등 명문화된 내용들이 존재해왔고, 우리는 그 기반에서 공동체라는 내용을 계속해서 합의하며 변화하는 지향점을 매만져 왔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의 의미 바깥에 서로를 위치시키고 투명하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방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소셜’의 같음에서 나와 공동체의 다름을 겪어내야만 한다. 거기에는 삶이 있고 사회가 있다.
“지금 여기 소셜적인 것이란 사회적인 것의 활황을 예증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이 부재한 개인이 스스로 사회적인 인간이라고 활발히 연기함을 시사한다.” (김신식, 앞의 책, 1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