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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Oct 25. 2024

넷이서 단 한 명을 생각하는 방법

기타리스트 빌 프리셀의 [Four](Blue Note, 2022)

 애도는 잊어버리는 행위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애도를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기억을 끄집어내서 마주 봐야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곧 어렵고 아픈 기억까지 외면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애도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없으면 우리는 애도의 대상을 제때 마음에 새길 수 없고, 상실은 아물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된다. 애도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지금부터 얘기할 빌 프리셀 역시 떠나보낸 사람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퍼하고 기억하고 껴안는다. 그는 음악을 통해서 애도를 전한다.  



 어린 시절부터 빌 프리셀의 친구였던 앨런 우드워드가 세상을 떠나고 그를 떠올리며 만든 ‘Dear Old Friend’는 정해진 템포 없이 회상의 멜로디가 흐른다. 그레고리 타디의 클라리넷은 섬세한 클레이튼의 타건과 함께 우드워드를 기억하려 시도한다. 빌 프리셀의 개인적인 인연임에도 그들은 프리셀 안에 우드와드와 함께한 시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감각하고 애도를 나눠가진다. 빌 프리셀이 처음 일렉트릭 기타를 손에 쥐었을 때 옆에 있었던 이를 수십 년이 지나 생각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회고의 의미가 함께 포개질 수밖에 없는 곡이다.


이어지는 ‘Claude Utley’ 역시 한 사람에 대한 애도이다. 이 곡에서는 화가인 클로드 어틀리의 작품에 대해 각자가 지닌 마음을 그린다. 처음에는 드럼과 피아노로 시작하는 곡을 차츰 확장하여 클라리넷과 기타가 스미듯 들어온다. 비슷한 라인의 멜로디를 연주하다가 어느새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연주는 서로 만났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캔버스에 다른 농도와 굵기의 선이 얽혀 하나의 그림이 탄생하는 과정을 재현한다.


4년 전 세상을 떠난 프로듀서 할 윌너를 위한 왈츠(‘Waltz for Hal Willner’)는 기타와 색소폰이 나란히 멜로디를 이끌며 시작한다. 연주가 전개되는 와중에 점차 하행하는 멜로디가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이 오스티나토는 곡의 시작과 끝, 전체를 갈무리하여 다른 빌 프리셀의 곡처럼 자유롭되 하나로 모아지며 종결되는 형태를 띤다. 자유로운 흐름이 본성인 그의 음악이 왈츠 리듬 위에서 반복되는 멜로디를 들려준 이유는 할 윌너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음악을 들으며 좀 더 편하게 곡에 몸을 맡기길 바랐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호흡을 잠시 바꾸며 이곳에 없는 이를 떠올리는 듯하다. 더불어 이번 앨범을 올해 세상을 떠난 트럼펫 연주자(이자 빌 프리셀의 지음知音이기도 했던) 론 마일스에게 전한다고 한 빌 프리셀의 마음을 그려본다. 막연한 일이지만 그의 음악이 여기 있는 한 아예 무의미한 시도는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연주를 좀 더 살펴보자. 빌 프리셀은 여전히 단순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한붓그리기처럼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른 연주들과 엮는다. 특별한 점이라면 이번에는 베이스 연주자 없이 곡을 꾸렸다. 근간이 되는 파트 하나를 제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역할을 각자가 나눠서 맡고 사려 깊게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대화를 쌓아나갈 테다. 앞서 언급한 모든 곡들에 해당되는 얘기이고, 곡의 초반에 제시된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집단 연주는‘Invisible’과 ‘Dog on a Roof’에서 두드러진다.


 한편 ‘Always’는 클레이튼의 솔로 연주로, 길게 이어지는 서스테인을 통해 깊이 있는 서정을 전달한다. 어쿠스틱 피아노가 앨범의 중간에 심호흡처럼 작용한다. 빌 프리셀이 과거 앨범에서부터 여러 번 연주한 오리지널 곡 ‘Looking For Hope’는 다른 버전에 비해 기타 톤이 정적이다. 이전의 연주들이 드럼과 좀 더 적극적으로 인터플레이했다면 이번에는 그레고리 타디에게 자리를 좀 더 내어주면서 곡을 좀 더 간결하되 일관성 있는 분위기로 이끈다.

이번 앨범에서 애도와 함께하는 마음, 각자의 목소리에 대한 존중을 함께 보여준 빌 프리셀은 멤버들을 퀄텟이라는 이름으로 묶지 않고 앨범 이름 그대로 ‘four’로 지칭했다. 이는 정규적으로 지속될 구성은 (아직)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넷’ 안에 온전한 각자의 자리가 있으며 동시에 그 자리를 서로에게 내어줄 준비가 됐다는 기꺼운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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