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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Aug 12. 2024

지아장커 다큐멘터리에 대한 거친 노트

다큐멘터리로 삶의 전경을 말하기


<동> 트레일러

<동>(2006)은 <스틸 라이프>(2006)의 모티프가 된 다큐멘터리다. 중국 현대화가 ‘리우 샤오동’이 중국 산샤의 댐 건설 현장 남성 노동자들과 방콕 여성 모델들을 화폭에 담는 과정을 따라는데, 영화는 리우 샤오동의 움직임에 따라 샨샤 댐이 준공되는 창강에서 출발해 태국의 방콕(메콩강)으로 이어진다.(작품이 세상에 나오고 수 년후 메콩강 상류를 점하고 있는 중국이 이 부근에도 댐을 지어 이권 다툼이 발생하는 건 어찌 보면 예견된 결과다.) 도시가 가지고 있던 전경을 변화시키는, 즉 댐 건설에 직접 자신의 육체로 노동을 투입하는 인물들의 신체와 흔적을 기록하기 위해 리우 샤오동은 그림을 그린다. 리우 샤오동이 포착하는 대상은 지아장커의 시선과 융합하고 충돌한다.

 

 리우 샤오동은 속옷차림의 노동자들을 그리지만 이들은 마치 대상화된 정물처럼 느껴지고, 이는 프레임속에서 리우 샤오동이 젊은이들을 보며 느낀 ‘생명력’과는 상반되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대상의 포즈를 설정하고 그들을 부동자세로 놓아두는 모습에서 어떤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신체는 오히려 그림 앞을 벗어남으로써 더 자유로워진다. 리우 샤오동 역시 붓을 거둘 때 그들의 삶과 더 가까워진다. 심지어는 영화의 마지막에 카메라가 시각장애인과 외국인 관광객-카메라가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뒤섞인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정착이 불가능한 인물을 묘사한다. 또한 여기서 통속적인 대중음악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시대성과 당대의 분위기를 환기한다. 전자음과 반복되는 앰비언트 사운드가 외화면에 틈입하면서 명명되지 않은 시점으로 리우 샤오동의 작품을 관조한다. 이는 회화 작품과 카메라가 포착하지 못한 빈자리를 확보하려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음악적 요소는 이어지는 작품들에서도 활용된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 대신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외지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샨샤에 온 지 열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이곳의 삶을 찍는다면 거짓말이 탄로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아장커는 영화의 코멘터리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그의 거리두기는 리우 샤오동이 그림이라는 매개로 인해 생기는 인물 간의 거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무용> 트레일러

 <무용>(2007)은 <동>을 제작하고 바로 다음 해에 만든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세가지 층위의 이야기로 나뉜다. 광둥의 의류공장 노동자들과 패션쇼를 준비하는 브랜드 ‘무용’의 디자이너 마커. 그리고 샨샤 지방의 탄광촌 노동자들과 양장점의 재봉사들의 이야기. 우선 대량생산의 일원으로서의 노동자와 대량생산을 거부하고 옷에서 역사와 기억의 맥락을 탐구하려는 디자이너 마커는 대비되는 존재다. 이 대비는 한 쪽의 의미를 흐리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이 어떻게 육체로 발현되는 지에 대한 차이를 보여준다. 또한 끊임없이 유동하는 시대에 위태롭게 서있는 사람들과 그 안에서 의미장을 형성하려고 시도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차이는 단순비교가 불가능하고 중층적이다. 아래에 언급한 남다은 평론가의 말은 영화가 보여주는 낙차를 실감하기 적절하다.

 

 “마커가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작업실에서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대량생산을 혐오한다고 말할 때, 그녀의 주장 에는 광둥의 소음 가득한 의류공장 작업라인 앞에서 고된 몸짓을 반복하고 지친 몸과 멍한 눈빛으로 양호실에 앉아 있는 노동자들의 막막한 현실이 담겨 있지 않다. 혹은 탄광촌의 광부들이 검댕 묻은 알몸을 물로 씻어내리 는 장면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그 곁에 그들 몸의 일부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은 작업복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 마커가 옷에 담긴 시간과 역사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과 모델들에게 일부러 흙을 묻히던 장면이 보여 주는 간극.”[1]

 

 노동자의 옷이 가진 유용함과 기억이 깃든 사물이라는 옷-정신적인 가치와 ‘본질’을 찾는-을 통해 쓸모에서 벗어나 의미에 다가가려 하는 디자이너 마커는 산이나 고원지대처럼 도시와는 다르게 토착민이 생활하는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면서 영화의 챕터도 샨샤 지방의 탄광촌으로 넘어가는데, 마커는 이곳에서 ‘사라지는 매개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후로 마커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고 대량 생산과 옷의 본질을 추적하는 하이엔드 패션 수공업 사이의 성긴 다리를 놓는다. 카메라의 초점 역시 이 지역의 재봉사와 그들에게 ‘기성품’을 맡기는 소시민의 모습으로 이동한다. 여기서 유용과 무용의 가치에 대한 선후관계는 규정할 수 없고 모호한 방식으로 놓여있다. 이 모호함 자체와 불안정성이 곧 현대 사회의 일상적인 풍경이 된다.

 

 <무용>에서도 역시 통속적인 가요가 흘러나온다. 노동자의 일상에 스며 있는 대중음악이 노동현장의 이미지와 미묘한 불협을 이루면서 ‘일상성’에 드라마적 외피를 씌운다. 이는 노동자라는 집단 기억이 매개물로 작용한다. 지아장커의 장편 데뷔작인 <소무>에서도 거리의 풍경을 비추며 동시에 사랑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이는 소음에 가까운 일상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상해전기> 트레일러

 마지막으로 <상해전기>(2010)는 영어 제목이 ‘I Wish I Knew’다. 이는 딕 헤임스가 부른 트래디셔널 팝이자 재즈 스탠더드인데, 영화의 제목에서부터 역사적, 개인적 기억의 매개물로서 음악이 등장한다. “기억으로의 공간의 역사를 재구성”(이희승, 김은정: 2020)하는 것이다. 또한 “여러 층위로 작동하는 요소들로 관객 스스로 상해의 역사와 현실을 재구성하게 만든다.”[2] 영화는 1930년대부터 2010년까지 상해라는 공간에서 변화를 겪은 17명의 인터뷰를 통해 그곳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다. 특정 사건을 직접 경험했거나 윗세대들에게 전해들은 역사적 상황은 사적 서사가 공적인 역사에 틈입하여 거시적 역사를 재구성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관찰자인 배우 자오타오(지아장커의 아내이자 대부분의 작품에 출연하기도 했다)는 상해 역사의 여러 층위를 보여주는 이미지-엑스포 준비에 한창인 도시 풍경, 오래된 도시의 흔적 등-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면서 도시의 풍경에 스며드는 동시에 돌출한다. 이는 마치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의 영화적 발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의미화된 도시의 전경을 매개하고 동시에 사유하는 플라뇌즈-플라뇌르의 여성형-인 것이다.

 

 <상해전기>에서도 청각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외화면에서 역사적 상관물인 사자의 울음소리, 모스 부호, 총소리 등이 들리면서 도시의 기억을 청각적으로 환기한다. 이처럼 현실에 스며드는 환상적인 요소들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상해는 19세기에는 ‘식민지’였고 20세기에는 ‘혁명가들의 도시’였다. 1946년 ‘해방’되었고 1966년 ‘문화혁명’ 을 거쳐 1978년에는 ‘개혁’과 1990년 푸등의 ‘개방’까지 상해의 역사는 복잡한 어휘들로 새겨져 왔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이런 추상적인 어휘가 아니라 그 배경에 감춰진 정쟁의 피해자들이요, 시간이 지나며 잊혀 진 그들의 인생이다.”

 

 지아장커는 프로덕션 노트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을 기점으로 잠시 <무용>으로 돌아가보면, 결국 <무용>은 의미화된 적 없지만 구체성을 지닌 노동자의 몸을 주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상해전기>에서는 웃지 못할 일화가 소개되는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이 중국에서 촬영할 때 현지 스태프가 함께 작업했음에도 문화대혁명 시기의 통제로 인해 작품을 보지 못해 아직도 해당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 모른다고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당시 마오쩌둥 정부의 부름을 받은 방직공장 노동자 ‘황 바오메이’의 인터뷰가 나오는데, 이처럼 영화는 상반되고 엇갈리는 개인과 역사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멈추지 않는 시대와 멈추지 못하는 인물들

 

 지아장커 감독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순응과 타협 외의 선택지가 없는 사회에서 인물과 무너지는 풍경을 응시한다. 이런 응시와 시점의 이동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구분짓지 않고 일관되게 나타난다. 또한 지아장커는 <천주정>과 <강호아녀>(2018)와 같은 장르물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의 변화와 시간에 대해 말한다. <강호아녀>에서는 주류 권력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세계 속에 있는 인물들의 서사를 그리면서 17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며 망실한 것과 파괴된 것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그는 자신의 영화 언어에 맞는 소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고자 하는 소재에 적합한 영화적 언어와 구조를 계속해서 찾는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지아장커라는 감독의 고유한 에너지가 스크린에서 드러난다. 시대의 조류 앞에서 멈출 수 없는 인물들의 무기력함을 넘어서서 이를 거스르려는 인물들의 궤적까지 영화에 어떻게 담아낼지… 지아장커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


[1] 남다은, ‘아티스트 3부작 중 두번째 작품 <무용>’, 씨네21, 2008년 5월 21일.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51448

[2] 이희승&김은정, 「지아장커의 <상해전기>에 나타난 영화적 미장아빔과 역사 횡단 연구」, 『영상기술연구』 2020년 5월 호, 한국영상제작기술학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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