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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원용 Oct 31. 2023

묘지 앞에서 쓰는 비망록

편혜영 단편소설「포도밭 묘지」

Ⓒ 문학동네

 상고를 졸업한 네 명의 인물들은 세상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도리어 이 세상과 잘 지내보고 싶어서 어떤 희망을 안고 세상에 다가가려 했다. 그럴듯한 청사진을 그려보기도 하면서. 하지만 세상의 사정은 달랐고 이들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이들의 기대치와는 상관없이 세상을 믿어보려 했던 시간은 자꾸 쓰러질 만큼 크진 않지만 꾸준한 대미지를 주는 ‘잽’처럼 그들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듯했다. 결국 세상의 구체적인 주먹질에 가장 먼저 무너진 건 ‘가장 아는 게 많았던’ 한오였다. 그가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그리고 펜글씨를 쓰며 다가가려 했던 ‘성공’의 길목에는 한오를 무너뜨릴만한 주먹들이 더욱 많았다. 


 이들은 누군가에게는 인지되지 않을 정도로 당연하고 쉽게 가능한 일을 끝내 할 수 없었다. 펜글씨 대신 컴퓨터, 타고난 외모, 신용장 변경 요청 서류, 부모의 형편. 이는 삶을 보이지 않게 잠식하고 그들이 원하던 삶을 운용하게 할 동력을 심심찮게 끊었다. 이는 포도밭을 천천히 말라 죽인 가뭄 때문일 수도, 혹은 너무 많은 비의 습격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포도밭은 애당초 맺히기도 전에 그 결실의 진력을 다 써버린, 그래서 예비된 꿈이었다가 유예된 꿈이 되고, 종국에는 유폐된 꿈에 가깝다. 그러므로 그들의 포도밭은 “황폐해버린 그해 가을”(기형도, 「포도밭 묘지 1」,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의 기억이다. 여기에서 어떤 희망을 찾기란 쉽지 않다. 


Ⓒ 문학과지성사


 한오의 시간을 떠올리는 화자와 친구들은 한오가 보았을 마지막 광경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힘겹게 담는 한오의 모습까지 그려본다. 한오의 마지막을 지켜본 것처럼 그를 상상하는 일은 잊지 않기의 다른 말이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묘지 앞에서 쓰는 비망록이기도 하다. “아무도 죽지”말라는 말은 이런 상상 끝에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다. 요청인지 부탁인지 명령인지 모를 이 말의 힘은 불투명하지만 쉽게 죽음에 자리 내주지 않겠다는 말일 것이다. 어떤 꿈은 적어도 ‘죽지 않기’에서부터 시작한다. 혹은 어떤 꿈은 ‘죽지 않기’가 된다. 포도밭 묘지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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