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발적인 코드(Chord)의 나레이터

즉흥연주와 쇼트의 관계성: <플란다스의 개>(봉준호)를 중심으로

by 조원용

*하루 일찍 올립니다!


1) 들어가며: 정재일의 <기생충>, 그 이전에 조성우의 <플란다스의 개>


영화의 가장 큰 물리적 축은 프레임이다. 이러한 프레임 바깥으로부터 움직이는 이미지에 틈입하여 서사의 층위를 두텁게 만드는 건 시각 외의 요소들이다. 바로 무성영화 이후의 영화가 시각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점유한 감각인 청각이다(4D 영화가 촉각이나 후각을 유의미하게 '점유'했다고 보긴 어렵다). 청각은 영화의 메인 플롯에 살을 덧대어 두텁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이미지에서 이탈하여 대위적인 의미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런 방식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음악(사운드트랙)'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은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안팎의 찬사를 받았고, 예외적으로 정재일의 사운드트랙이 이미지를 제치고 언급되기도 했다. <기생충>에서 사용된 음악이 형식적으로 두드러지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크'다. 바로크의 극적인 전개와 장대함은 외적으로는 부조화를, 내적으로는 권력과 계층에 대한 반영으로 나타난다(박병규: 2021). 또한 박사장 아내가 기택과 함께 다송의 생일파티 준비를 위해 장을 보는 장면에서는 동요풍의 노래에 톱을 활로 긁어서 만들어낸 소리가 개입하면서 질료적으로 돌출한다. 이는 다른 소리들의 주파수와 구별되면서 인물의 불안한 심리와 "내적 동기화"를 이룬다(박병규: 2021). 이렇게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음악적 요소는 이미지와 유기적인 형태로 (불)화협하면서 종합적인 형태의 이미지-복합체로 제시된다.


이런 방식은 그의 첫 번째 장편 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에서부터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생충>은 바로크와 질료적 소리를 통한 의미장을 형성한다면,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즉흥연주'로 이루어진 사운드트랙이 영화 내내 제시되면서 상황과 인물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투영하고, 동시에 배반한다. 영화의 내러티브와 인물의 심리적인 기제에 즉흥연주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는 건 익숙해진 세계에서 의뭉스럽게 덮여있던 부분을 다시 들춰보는 일이 될 것이다.


2) 통로와 추격의 공간: 타악기의 서스펜스, 혹은 없거나 우발적인 코드(Chord)들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 복도는 그 자체로 통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추격의 공간으로 변모한다. 극의 초반 윤주(이성재 분)가 복도에서 삔돌이(강아지)를 발견하는 순간은 오해의 불씨이자 사건의 시작이다. 일방향의 공간인 복도에서는 화성(하모니, 화합)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퍼커션 솔로와 피아노의 불협화음이 이어진다. 이렇게 단발적으로 발생하는 리듬은 우발적으로 삔돌이를 납치하는 윤주의 심리를 질료적으로(통통 튀는 퍼커션 소리, 스산한 드럼 브러싱 등) 대변한다. 반면 극의 중반에서 현남(배두나 분)이 윤주를 쫓는 복도 추격 시퀀스에서는 여러 악기의 집단 연주가 두드러진다.


우선 두 인물이 비상계단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기 전까지, 정확히 말하면 현남이 위층 계단에서 아래쪽 계단을 바라보는 시점 쇼트에서 윤주를 발견하고 그에게 소리치기 직전까지는 퍼커션과 드럼이 잠재된 서스펜스를 낮은 음역대의 드러밍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 둘의 본격적인 추격이 시작되는 순간, 베이스를 필두로 색소폰과 기타, 피아노가 가세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연주한다. 이런 종류의 동시다발적인 즉흥연주는 '스윙(Swing)'의 장르적인 특징인 동시에 1960년대 오넷 콜먼을 위시한 '프리 재즈'의 두드러지는 양식이기도 하다. 이 시퀀스에 사용된 방식의 집단 연주는 스윙보다는 좀 더 분방한 형태의 프리 재즈에 가깝다.


계획적으로 직조되지 않고 우발적이고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즉흥연주는 치밀하게 연출된 추격 시퀀스에 동적인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즉흥연주를 위한 너른 틀로써 장면(Scene)이 작용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런 방식은 재즈 아티스트가 참여한 사운드트랙 작업에 활용되곤 했다. 루이 말 감독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échafaud, 1958)의 음악감독을 트럼펫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마일스 데이비스가 맡았는데, 그는 영화의 푸티지를 영사해 놓고 영화의 분위기에 맞게 미니멀하고 서늘한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냈다. <플란다스의 개>의 조성우 음악감독과 연주자들 역시 느슨한 템포와 코드 진행 정도만 정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곡을 구성해나갔다. 이렇듯 갑자기 등장하는 코드(Chord)들은 정제된 프레임에 침투해 어느새 이미지와 나란히 서사를 이끌고 있다.


3) 당신을 듣기: 백문이 불여일청


이미지와의 위계를 두드리며 틈을 만드는 즉흥연주는 장면뿐만 아니라 인물의 설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의 초반 현남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설정'인 출근 시퀀스에는 콰르텟 구성의 '비 오는 날 #1'이 흐른다. '비 오는 날#1'은 느린 템포의 워킹 베이스와 피아노가 주축이 되어 현남의 일상을 관조하는데, 뒤뚱거리는 피아노 음계는 핀트가 묘하게 어긋나는 인물을 고스란히 스케치한다. 여기서 장면이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와 곡의 분위기, 즉 '테마'의 연관성이 두드러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장면의 분위기를 포착하여 만들어낸 멜로디는 곧 테마가 된다.

재즈에서 '테마 솔로(즉흥연주)'는 헤드 멜로디(주선율)를 모티브로 선율적 연관성을 벗어나지 않은 채 연주하는 것인데, 이 개념을 대입해서 바라보면 극중 연주가 장면의 분위기와 서사의 흐름을 반영하고, 이는 '테마'-선율에서 확장하여 장면을 토대로 한다는 의미에서-를 기반으로 한 즉흥연주가 된다.


극 중반 현남과 윤주가 순자(윤주와 은실의 강아지)를 찾기 위해 벽보를 붙이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Flanders' Rag'도 장면의 '테마'에서 비롯한 즉흥연주의 흥미로운 예시다. 잃어버린 순자를 찾는다는 상황과 대비되는 장조의 멜로디가 이어지는데, 화면의 미장센도 일상의 밝은 부분을 담아놓은 듯 화창한 톤 앤 매너를 유지한다. 'Flanders' Rag'에서의 'Rag'는 재즈의 모티브가 된 피아노 장르 중 하나인 래그타임(Rag-Time)에서 비롯했는데, 당김음이 많은 춤곡 위주의 장르라는 면에서 '어두운 상황 속 밝은 이미지'이라는 아이러니에 힘을 싣는다. 이는 이어지는 신에서 수상한 경비원(변희봉 분)의 뒤를 쫓는 상황을 부각시킨다. 또한 정반대인 고음역의 목관악기를 사용하면서 소리의 질감 역시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영화의 마지막, 현남과 윤주는 각각 다른 공간과 장소에 위치한다. 우선 현남은 숲 속에 서있다. 현남은 왼쪽으로 가는 듯하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의 선택을 비추는 카메라는 뒷모습 클로즈업에서 시작해 프레임의 원경으로 걸어가는 궤적을 응시한다. 현남이 방향을 바꾸는 순간 숲속의 앰비언스가 엔딩 타이틀곡으로 바뀐다. 이는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쿠로다 요시오, 1975)의 주제가를 모티브로 즉흥연주한 곡이다. 익숙한 멜로디의 곡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변주되며 뻗어나가는 것은 현남이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이탈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이후에도 숲의 전경은 이어지고, 카메라는 망원으로 현남과 친구 장미(고수희 분)를 담는다. 영화 중반 장미가 몸을 던져 깨뜨린 사이드 미러는 여전히 현남의 품에 있다. 현남은 이 사이드 미러에 햇빛을 반사시켜 관객에게 비추는데, 이 반사광은 가볍게 제4의 벽을 넘어서 우리에게 작지만 확실한 반영과 성찰의 흔적을 남긴다. 이제 우리가 맞이하는 것은 체리필터가 부르는 '플란다스의 개'다. 이 파격적인 원곡의 변용은 반항과 저항의 음악인 록을 관객에게 선사한다(재즈 역시 마찬가지다).


4) 나가며: 우리가 믿어야 할 한 사람의 모습


교수가 된 윤주는 강의실 창밖 풍경을 바라보고 서있다. 그와 숲 사이에는 투명하지만 통과할 수 없는 벽이 하나 있다. 윤주는 숲을 오직 바라만 볼 수 있고, 그곳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내 그는 건조한 태도와 말투로 수업을 진행한다. 슬라이드를 보기 위해 창은 암막 커튼으로 가려지고, 윤주는 더 이상 밖을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된다. 이 장면은 현남의 이동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윤주는 자신이 내내 원했던 '교수'의 자리를 얻었지만 정해진 경로에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과 시간이 개입할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공간은 시간이 배제된 장소고, 장소는 시간이 개입된 공간이다"(함성호). 그러므로 윤주가 있는 강의실은 공간이 되고, 걸음을 옮기는 현남의 숲은 새로운 시간이 틈입하는 장소가 된다.


또한 윤주가 있는 강의실에는 어떤 음악도 흐르지 않는다. 그를 추동하게 하고 그가 추동하게 한 즉흥연주들이 더 이상 윤주를 대신하여 말하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이로써 자명해지는 것은 하나다. 영화에서 살아있는 내면의 매개는 즉흥연주였다는 점이다. 내면의 풍경과 사건의 전경을 만드는 즉흥연주는 꽉 짜인 프레임을 이처럼 고유한 방식으로 환기시킨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내면이) 연주되지 않는 윤주가 어떤 가능성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공허해진 인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결론지어진 것일까. 물론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혼란스러워 보인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에 오히려 강의실 밖으로 나갈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다. 우리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윤주 역시 자신의 말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흔들림이 곧 다시 움직일 그를 암시한다. 한 시인은 이렇게 말했고, 나는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당신 자신을 믿지 못하기에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인용은 클로드 뮤샤르에게 김혜순 시인이 건넨 말이다. 클로드 무샤르, 『다른 생의 피부』(구모덕 역), 문학과지성사, 2023, 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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