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와 시, 그리고 그녀들의 이야기 2
정아언니를 위한 발레아다
재료(1인용):
블랙빈(원래는 레드빈이 쓰인다), 토마토 1개, 양파 반 개, 벨페퍼 1/4개, 쿠민, 라임주스, 소금, 표고버섯, 애호박, 그릭요거트(원래는 크렘프레시 혹은 사워크림), 똘띠야, 달걀 2개, 그라나빠다노 치즈(파마잔도 오케이)
만드는 과정:
1. 블랙빈을 으깨서 얇게 다이스로 썬 양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볶아준다.
2. 토마토, 양파, 벨페퍼, 쿠민, 라임주스, 소금으로 피코데가요를 만들어준다.
3. 달걀은 스크램블에그로 만들어주고, 표고와 애호박을 소금 간해서 볶아서 준비한다.
4. 구운 똘띠야에 빈, 달걀, 살사, 볶은 야채를 넣고, 그릭 요거트를 뿌리고, 치즈를 얹어 마무리한다.
원래 중남미 요리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멕시칸 요리만 사 먹다가 동네에 온두라스 식당이 있어서 발레아다(Baleada)를 처음 먹게 되었다. 날씨 쌀쌀해진 가을 아침에 따뜻한 발레아다가 부드럽게 넘어가서 배를 따뜻하게 데워주고, 씁쓸한 커피로 입가심을 하면 그만큼 만족스러운 아침이 없었다. 심플한 발레아다(Baleada Sensilla)는 아침식사로 아메리카노와 먹는 게 가장 찰떡이지만 햄이나 닭 살사 등 좋아하는 재료를 듬뿍 넣고 든든하게 저녁으로 먹는 발레아다 믹스따(Baleada Mixta) 를 해 먹어보기로 했다. 집에 없는 재료들도 많았지만, 블랙빈이라던가, 토마토, 달걀 등 주요 재료가 있어서 집에 있는 나머지 버섯과 애호박을 추가해 한국식 발레아다 믹스따가 근사하게 완성되었다.
정아언니와 함께
언니를 처음 만났던 건 이태원의 어느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였는데, 자연스럽게 서로의 징글징글한 과거 연애 얘기를 건네며 낯을 텃었던 기억이 있다. 언니와 소셜 계정을 공유하고 나서는 아마 거의 인스타그램으로 교류했다. 언니는 작품을 왕성하게 작업하고 인스타그램을 공유하는 작가인편인데, 과거의 작품부터 습작 그리고 영감을 얻는 원천까지 맞팔을 하면 속속들이 알아볼 수 있었다. 언니의 작품들을 보고 단숨에 매료되었고 막연하게 이 사람에 대한 동경이 파릇파릇 자라났다. 언니가 그리는 세계는 동화적이고 환상적이다. 그 환상의 세계의 등장하는 요정들은 지푸라기, 도둑, 색색의 옷을 걸친 방랑자들로 마치 애니메이션을 정지해서 캡쳐한 것처럼 생생하여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곤소곤 들려주는 것 같다.
나는 언니가 자신의 작품 요정들처럼 분열되어서 무릎을 괴고 어느 구석에 앉거나 혹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여기 저기서 매일 분주하게 맡은 바 임무(그리기)를 다해내는 사람인 것 같았다. 한국의 대학 그리고 미국과 유럽에서 생활했다던 언니는 국적을 초월하는 취향을 가졌고, 많은 걸 경험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냉소가 담긴 유머를 구사했다. 이 날 언니와 근황과 연애 등에 대한 시시콜콜한 대화들을 아주 즐겁게 했지만, 마음에 흐르는 어떤 예술가로서 사명적인, 거시적인 철학적 사고들을 현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았기에 오히려 무겁게 그런 것들이 느껴졌었다. 요정들이 보이지 않게 언니 곁에서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언니는 볶음, 무침, 얹어먹기 처럼 재료가 완전 보이거나 커리나 이디오피아음식처럼 대놓고 요리해버린 건더기 있는 되직한 국물요리를 원했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고 싶었기에 똘띠야에 여러 재료를 얹어먹을 수 있는 발레아다 믹스따와 부드러운 밤 크림 토란 수프로 없는 국물?을 보완한 식사를 구성했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이태원의 터키 베이커리에서 산 바클라바로 후식까지 배부르게 먹은 은 뒤, 남산 순환도로를 따라 산책하며 남산식물원까지 이끼를 구경하러 갔다.
빛의 산
안희연
눈이 멀 것이라 했다 되돌아오는 길이 없다고 했다 빛의 산에 관해 알려진 건 그것이 전부였다
우리는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 빛의 산이 최후의 보루일지도 몰랐다 등 뒤에는 상해버린 시간들 우리는 앞만 보고 걸어갔다
좁고 가파른 길이었다 몇몇은 주저앉았다 이 질문은 무게가 없어요 이런 슬픔으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어요 그런 말들에 발이 묶인 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펼쳐지는 풍경이 있었다
어떤 이는 마을을 뒤덮는 해일을 보았다 했다 어떤 이는 집을 부수는 포클레인을 보았다 했다 어떤 이는 강물 위를 떠가는 검은 외투를, 어떤 이는 팔랑팔랑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누구에게나 공평한 빛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시간으로 흩어져갔다
이야기는 거기서 막혔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군 다른 입구를 찾아야겠어
더욱 날카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침묵을 앞세우고도 걸었다 계절을 날씨를 달리해도 번번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을 보았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빛을 보았다
빛의 산이 멀리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빛의 산이 멀리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어
시인이 말하는 빛의 산은 욕망은 말하는 것일까? 이상적 세계, 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고민해 보았다. 빛의 물성과 산의 물성을 떠올려본다. 눈부시게 빛나는 켜켜이 쌓여 봉긋 올라온 울창한 숲의 산. 시인은 눈이 멀 거라고 했고, 되돌아오는 길이 없다고 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내가 바라는 어떤 이상향적, 대안적인 삶은 그런 빛의 산의 모양을 하고 있다. 너무나 밝고 아름다워 함부로 쳐다볼 수 없고, 한 번 발자국을 떼어 살기 시작하면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어떤 삶의 길이 쌓이고 쌓여 빛의 산을 이루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예술을 동경해 왔다. 내 안의 세계를 마음껏 표현해 내는 예술가의 아름다운 삶. 우리 집은 교육자 집안인 데다가 주변 사람 어느 누구도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그 삶은 내가 감히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이라고만 느껴졌다. 그런 동경하는 예술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 중 하나인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한다. 비슷한 고민을 하고,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같은 세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다른 듯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빛의 산이 아주 가까이에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빛과 산, 그 장엄한 물성자체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끝, 그리고 상한 시간들이 우리를 옥죄여오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기에 마음에 빛의 산을 품고 계절을 나며 나이 들어가고, 조금씩 더 명료해지는 삶의 그림자에 눈앞에 아른거리게 되는 가까이의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빛의 산은 우리가 살아온 감히 볼 수 없는 삶의 모양 그 자체가 아닐까. 감히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야만 볼 수 있는 스스로의 삶이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는지도 모르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금'의 풍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언니와 남산 정원을 산책하면서 배롱나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가로등과 분홍빛 꽃잎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장면에 잠시 취했었다. 잠시 그렇게 취해있는 것, 빛의 산의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에 다만 감사할 뿐이다. 혹여나 눈이 멀까, 지나온 내 시간들이 상해버릴까 가끔, 아껴가면서 바라보는 소중한 장면들. 찰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