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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이루기에 가장 좋은 때

시피리, <알프스의 소녀>

by pea

크리스마스 시즌이네요..

어릴 적에..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크리스마스 마케팅이 지금처럼 심하지는 않았고, 전 유치원에도 다니지 않았죠.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작은 기적이 일어나거나 작은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조금은 실망하며 살았던 것도 기억이 나요..

늘 간절히 원했던 것이 있는데, 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거든요...

크리스마스는.. 실망의 정점 같은 것이었던 것 같아요...

.. 이제 저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바라지 않는 어른이 되었지만,

누구나 마음속에 바라는 일이 있을 테고, 또 간절히 바라는 뭔가를 품고 있겠죠.

저처럼 매년 아무 기적 없이 보내는 어린아이들도 있을 거고요...

반복되는 실망 속에서 저를 위로했던, 그 책으로부터 소원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하이디는 할아버지 침대 옆에 사다리가 있는 것을 보고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다락방인데 냄새가 좋은 마른풀이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둥글게 생긴 작은 창문으로 아름다운 골짜기를 한눈에 바라볼 수도 있었습니다.

.......

하늘은 쪽빛이었습니다.

햇빛이 산의 푸른 목장을 반짝반짝 비치고 있었습니다.

븕고 노란 가지각색의 예쁜 꽃들이 기쁜 듯이 머리를 흔들며 태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세계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다면 넌 어디에 살고 싶어?”

어릴 적 골목길에 옹기종기 앉은 채 저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습니다.

수다의 주제 중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이라는 걸 꿈도 꿀 수 없었던 나이였지만,

세계지도에서 텔레비전에서 세계가 넓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난 미국!"

가장 흔하게 나오는 나라가 미국이었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아이들도 연이어

“나도, 나도!”를 외쳤습니다.

피라미드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누군가는 “난 이집트!” 하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난 알프스!”

스위스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전에

저는 이미 알프스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커보니 저 말고도 많은 사람이 알프스가 있는 스위스를 지상낙원쯤으로 알고 있더군요.

알프스가 아름답다지만, 사진 한 장 구경하지 못한 그 시절 어린아이의 낙원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전 생각합니다.

알프스에 하이디가 살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제 마음을,

그리고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을 것입니다.


산이 불타는 듯한 노을, 반짝반짝 빛나는 냇물, 메에에~ 우는 염소는 제가 살던 동네에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먼데다 개발이라는 말도 어색했던 시절에 고향은 봄이면 울긋불긋 꽃 대궐이었고,

사시사철 쪽빛 하늘에, 목장에 가면 향기 나는 건초도 충분했습니다.

외할머니댁에 가면 다락방도 있었죠.

그랬음에도 저는 하이디가 사는 산골마을은 제가 보고 있는 시골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곳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4800미터의 몽블랑을 갖고 있는 알프스의 산세와 자연은 빼어났겠지만,

아마 저는 설악산이나 대관령 목장에 살았더라도 여전히 알프스를 꿈의 세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곳에는 하이디가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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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율도국, 코케인, 무릉도원, 아르카디아, 천국, 아틀란티스, 에덴동산, 선계, 샹그릴라.......

우리가 가보지 못한 꿈의 세계의 이름은 이렇게나 많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란 누구나 이상향을 꿈꾸는 것 같습니다.

이상향은 하나같이 그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펼치고 있지만,

아름다운 경관만으로는 결코 이상향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았고, 각자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노인에게는 그의 생애를 편안히 마치게 하였고, 장정에게는 충분한 일을 시켰고,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성장할 수 있게 하였으며.......

도나 폭력도 없었으며 아무도 문을 잠그는 일이 없었다.

-<예기> ‘예운禮運’, 이상옥 편저, 명문당 p617~618


<예기>에서 이르듯이, 이상향에는 반드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삶의 형태가 그려져 있습니다.

유토피아에서의 사람들의 삶은 동양과 서양이 약간 다릅니다.

서양의 코케인이나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아무 일 하지 않고 무한한 자유와 풍요를 누리지만,

동양의 이상향에서 일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무위도식의 이상향이라 할 선계仙界는 말 그대로 신선이 사는 세상으로,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동양에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이상향은 <예기>에 나온 것처럼

너와 나의 차별 없이 모든 것을 다 같이 누리는 사회로

노동한 만큼 풍요를 누리고

그럼으로써 인심이 안정된 곳으로 그려집니다.

서양으로 치면 유토피아 정도가 동양인이 생각하는 이상향과 맞아떨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있지만,

제아무리 아름답고 풍요로워도 사람이 없으면 이상향이 될 수 없다는 공통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마치 하이디가 오기 전,

오두막 앞의 알름 할아버지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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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에게 알프스가 인간의 유토피아에 대한 꿈을 자극시킨 것도 같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에서 살게 된 하이디가 성장해가는 모습이

어린이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꿈꾸게 한 것은 아닐까요?

어린이에게는 성장이 삶의 전부이니, 하이디의 성장이 가장 이상적으로 보였던 것이죠.


그곳에서는 모두가 하이디를 사랑합니다.

남들에게는 무뚝뚝한 노인인 알름 할아버지는 하이디에게만은 모든 사랑을 다 쏟고,

무식한 염소치기 페터도 하이디의 말 한마디에 열심히 공부하는 좋은 친구입니다.

페터의 눈먼 할머니는 아이다운 부드러움으로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하이디에게

그 고독만큼의 사랑을 쏟아 붓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의 성장과정에 고통이 빠질 수는 없지요.

하이디를 알프스로 데려다 준 이모 데테는 하이디를 다시 도시로 데려갑니다.

하이디를 학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데테는 그저 평범한, 지금 우리 곁에 흔한 그런 어른이었을 뿐입니다.

어린 조카를 어쩔 수 없이 산골로 데려다 줄 때, 아마 데테는 눈물 깨나 쏟았을 것입니다.


데테는 언덕길을 내려가며 자기를 달래듯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하이디야, 부디 몸 건강하렴. 나도 이제부터 열심히 일할게. 돈 많이 벌면 곧 데리러 올게. 건강히 잘 지내라.”

자기를 달래듯, 데테는 하이디를 향한 결심을 중얼거립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해줄 수 있는 것, 그것은 곧 교육이겠지요.

글을 읽고, 교양을 배워 좀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거나 직업을 갖게 해주는 것이,

19세기 유럽 변방에 살던 한 여인이 조카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누구나 데테의 입장이었다면 하이디가 시골뜨기가 되게 내버려두지 않으려 했을 것입니다.

데테가 하이디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데려간 것은,

그러니까 이모로서 최대한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하이디는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어른들은 언제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래의 걱정 보따리를 아이의 어깨에 메어주곤 하죠.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니, 프랑크푸르트로 간 하이디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 기억하고 있지요..

하이디는 단 한 번도 그곳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하이디는 자기가 이곳을 떠나면 모두들 은혜를 모르는 아이라고 욕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하이디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습니다.

하이디는 괴로움 때문에 밥도 먹지 못했고, 얼굴도 파리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이디는 밤에 잠도 잘 자지 못했습니다.

하이디가 자리에 누우면 알름이랑 빛나는 햇빛이랑 꽃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습니다.

겨우 잠이 들면 하이디는 또 빨갛게 물든 뾰족한 바위랑 큰 눈벌판의 꿈을 꾸곤 했습니다.

하이디가 기뻐서 알름 할아버지의 오두막집을 뛰쳐나가려고 할 때면 꼭 잠이 깨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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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에는 연약한 친구 클라라가 있었습니다.

로텐마이어 여사와 티네테 말고는 모두 하이디에게 친절했죠.

하이디는 클라라의 할머니로부터 배우는 즐거움과 하나님을 믿는 법 등을 배웁니다.

사려 깊은 할머니의 힘으로 하이디는 또 한 뼘 성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하이디의 지독한 향수병을 위로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하이디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왜 어린 하이디가 저런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도 어른들은 공부만 중요하다고 했구나,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하이디가 얼른 알프스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페터는 얼마나 하이디가 그리울까, 페터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할까,

알름 할아버지의 성격이 더 괴팍하게 변했으면 어떻게 할까.......

하이디만큼 한숨을 쉬며 읽었습니다.


결국 하이디는 몽유병이라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귀신소동을 일으키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그 덕에 드디어 알름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죠.

그리고 너무 몸이 약해 걷지 못했던 클라라까지 알프스 자연의 축복을 받아 건강해집니다.


작가는 도시는 문명이라는 것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이들이 자라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자연이야말로 어린이의 천국이며,

문명과 교양은 그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배려심 깊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면 된다고 믿습니다.

돌아온 하이디가 페터에게 글자를 가르친 것처럼 말이죠.


결국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야기로, <알프스의 소녀>는 끝이 납니다.

한껏 미소를 지으며 책을 덮을 수 있는 책이었죠.

그런데 다 읽은 제게 문득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클라라의 할머니가 하이디에게 해준 말이었습니다.


“하이디, 말해보렴. 왜 그렇게 기운이 없지? 아직도 괴로운 일이 있는 게 아니냐?”

“예, 괴로워요.”

“그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렸니?”

“예.”

“그럼 ‘저에게 즐거움을 주소서.’하고 기도는 드렸니?”

“아뇨. 요새는 아무런 기도도 하지 않아요.”

“뭐? 하이디, 왜 기도하지 않는 거지?”

“아무 소용도 없는데요? 하나님은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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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라 할머니는 하이디에게 종교심을 심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믿음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깨닫게 해 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후 할머니의 질문에 대해 하이디는 솔직하게 말합니다.

하이디는 여전히 알프스에 갈 수 없었으니까요.


어렸지만, 저도 궁금했습니다.

하이디와 똑같지는 않았지만 저에게도 소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뤄졌으면 하는 소원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원했던 소원은 이뤄질 가망도 없어 보였습니다.

특별한 종교가 없었기에 기도하는 방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기도 같은 것은 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이뤄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을 반짝이며 다음 부분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일도 다 알고 계신단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좋지 못한 일을 기도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는 거란다.

그러나 진심으로 기도를 계속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면 네 소원을 꼭 이뤄주실 거야.”

하이디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겠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네 소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단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고 계실 거야.

‘하이디의 소원을 꼭 들어주자. 하지만 하이디에게 꼭 필요한 시기에 둘어줘야겠다.

소원을 너무 빨리 들어주면 하이디가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니까.

아, 그때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면 안 되지.’ 하고 말이야.”


클라라 할머니의 말씀은 제게는 하나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너무 빨리 소원을 들어주었다가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자란 후에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사자성어를 비슷한 맥락으로 읽기도 했죠.


새옹이 귀한 말을 잃었다고 남들이 위로할 때, 새옹은 하나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잃어버렸던 말이 식구를 불려 왔을 때, 남들이 축하해줄 때도 좋아하지 않았죠.

새옹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새옹은 인간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의 좋음과 나쁨을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이디에게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려 소원을 지켜주는 하나님이 계시듯,

인간보다 큰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어른이 되어서도 클라라 할머니의 말씀은 아주 여러 번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어릴 때의 소원보다 어른의 소원이 더 간절할 때가 많죠.

먹고사는 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 흥하고 망하는 일, 실패하고 성공하는 일.......

그 자체가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바람들이니까요.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약하고 작은 지를 실감합니다.

종교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겠죠.


우리나라는 작가가 되려면 등단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저도 등단을 위해 간절하고 간절한 바람을 갖고 살았습니다.

선생님들은 너무 이른 등단이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매년 새해 첫날이 되면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나고 나니, 소원은 간절함을 넘어 생사의 문제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가끔 클라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물론 아직도 시간이 안 되어서 소원을 이뤄주시지 않는 거라고 믿기는 싫었지만,

그래도 가장 좋은 때를 기다려 소원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또 다른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저의 글이 단련되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깊은 뜻이 있었다면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이제는 저도 믿습니다.


너무 간절해서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소원들.......

버릴 수 없기에 담고 있는 소망들이 모두에게 하나씩은 있을 테죠.

세상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하늘마저 내 진심을 몰라주는 것 같을 때,

클라라 할머니의 교훈을 떠올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늙었을 때,

똑같은 간절함으로 눈물 흘리는 누군가에게 똑같은 말을 해줄 수 있을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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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 읽은 책


삶은 그녀에게 모든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삶은 그녀에게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많은 대가를 치러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고,

그것도 몇 가지밖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 싸움은 그녀 혼자서 해야만 하는 싸움이었으며, 티타에게 삶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민음사, p176


때로 세계문학 읽기는 비행기를 타고 떠나는 여행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민족성이니 인종적 특징이니 하는 것을 믿지 않지만,

어떤 환경에서 가장 오래 살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구분 지을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특히 영미계의 작품과 스페인, 중남미계의 작품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는 인생관에 큰 차이점이 있어

비교해서 읽으면 매우 즐겁습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끈 작품인데,

막내딸이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고집에 꿈과 사랑을 억눌러야 한다는 점에서,

주인공 티타는 하이디와 좀 닮은 듯도 합니다.

하이디 역시 이모의 고집 때문에 알름으로, 하이델베르크로 옮겨 다녀야 했으니까요.

하이델베르크의 점잖은 마나님 클라라 할머니는 하이디에게 종교의 문을 열어주었지요.

하지만 티타의 할머니는 좀 더 실용적인 충고를 해줍니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같은 책, p124-125

소원이 언제 이뤄질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 안의 불꽃만큼은 축축해지지 않도록 가슴 깊이 살려두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결국 소원을 이루고 열망의 불꽃을 터뜨릴 수 있는 기본적인 자세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ps. 1. 인용한 동화의 출처는 1975년 10월 15일 초판 발행한 국민서관의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입니다.

번역자는 서영은 선생님입니다.

2. 그림은 역시 같은 책의 삽화가셨던 박찬복 선생님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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