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른, <곰돌이 푸>
곰돌이 푸는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가운데 하나입니다. 둥글둥글 노란 이 아기곰은 너무한 캐릭터입니다. 너무 뚱뚱하고, 꿀을 너무 좋아하고, 너무 느긋해요. 어떤 일에도 스마일 마크처럼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모릅니다. 낙천적이고, 솔직히 멍청할 정도로 어수룩하며, 성격도 순한 푸... 사실, 현실을 아는 어른들은 이런 꼬마가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지 확실히 말하기 힘들 겁니다. 아이들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이런 아이가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고, 따돌림당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본 탓이죠... 하지만 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습니다. 곰돌이 푸가 살고 있는 크리스토퍼 로빈의 세계에서뿐 아니라, 어린이에게 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말이지요.
옛날 크리스마스 카드 풍 그림처럼, <곰돌이 푸>는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입니다. 아주 어릴 때 읽지 않아서인지 막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피식피식 푸의 꿀단지처럼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하지만 곰돌이 푸만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생각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낙천적인 동물 캐릭터로 그려진 동화란 사실 얼마나 흔한가요? 하지만 <곰돌이 푸>는 어른이 된 후까지 제 마음에 남는 동화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푸로 인해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귀여운 캐릭터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이 나곤 했죠. 하지만 어른에게도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힘을 가진 것은, 푸가 아니라 당나귀 이요르였습니다.
“이요르, 안 나오면 좋겠어. 이상해.”
<곰돌이 푸>를 굉장히 좋아하던 친구는 이요르를 싫어했습니다. 친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건 어린시절이었습니다. 이요르는 참 별로였습니다. 어린 아이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였습니다. 모두들 즐겁게 노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분위기를 깨뜨리는 친구 같았습니다.
어쩌면 당연합니다. 어린 생명들은 늘 긍정적이니까요. 늘 신날 일을 찾아다니고, 그러느라 모험도 감행하는 것이 바로 어린 시절이니까요. 꿀을 너무 먹은 푸가 토끼 굴을 빠져나갈 수 없어도, 캥거루 아기 루가 사라졌어도 뭔가 들썩들썩 신나는 분위기는 여전한데, 이요르만 나타나면 어딘지 모르게 주위의 명도가 1도쯤 내려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꼬리가 없어져서, 집이 무너질까봐....... 참, 걱정도 가지가지였습니다. 어린 독자에게는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이요르만 늘 푸르죽죽한 세상에 살고 있었습니다. 곰돌이 푸의 세상은 사계절 내내 봄기운으로 가득했는데 말이죠.
그런데 살짝 의문이 듭니다. 어린시절이 언제나 화창하기만 한 걸까요? 왜 우리는 이요르를 이해할 수 없었을까요? 어린시절이라고 해도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아이들이 넘쳐나는 슬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죠. 우울증을 앓는 아이들도 있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울함의 정서를 압니다. 그런데도 이요르는 아이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특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시간을 뺏고,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을 긍정하게끔 교육받는 우리 사회에서는 말이죠. 우울하고 슬픈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정서라고 받아들이게끔 도와주는 사람이 주변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정서가 뭔가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그래서 정서에 대한 이해를, 나아가 자신에 대한 이해를 막아버리게끔 하는 무언의 폭력이 주변에는 가득하죠. 그러니까 어린시절의 우리는 이요르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이요르를 이해할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울함이란 정서를 알게 되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조금씩 불행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결국엔 누구나 우울이라는 정서에 대해 알게 됩니다. 비로소 이요르의 축 처진 눈매에 눈길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푸와 친구들의 밝음을 마음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요르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은 풍요로움이겠죠. 어린 시절 보다는 작아진 푸의 세계, 그 만큼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요르의 세계. 어른이 되면 점점 이요르의 세계에서 살게 되지만, 운 좋게 평범하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세계에 푸나 피글렛, 루, 티거 등도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운이 빠질 때, 우울할 때, 문득 돌아보면 밝은 세상이 우리의 어깨를 툭툭 쳐주곤 합니다. 마치, 푸가 겁을 내지 않으려고 항상 애쓰는 피글렛을 응원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운이 조금 안 좋은 사람들은 이요르가 앓은 것보다 더 큰 병을 앓습니다. 우울함이 병이 된다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죠. 어른이라면, 주위에 우울증을 앓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런 사람이 없는 척 살지 않고 이해하고 싶다면, 우울증에 대한 첫 번째 텍스트로 <곰돌이 푸>를 다시 한번 읽어보시면 어떨까요? 어릴 때와는 달리, 이요르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말이에요...
즐거운 숲속 세상에서 혼자 우울해하던 이요르와 마찬가지로 우울한 사람들은 어찌 보면 즐거운 기분을 잡치게 하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세상이 밝고 환할 때, 모두가 신이 난 듯한 연말연시에 홀로 등을 보이며 세상과 멀어지곤 합니다. 인간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만이, 우울의 정서에 공감해본 사람만이 그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숙한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우울한 사람들은 푸의 세계에 사는 이요르처럼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분위기 파악하지 못한다고, 분위기 다운시킨다고 농담 같은 핀잔을 듣습니다.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울한 사람들은 자신의 우울을 숨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네, 우울한 우리는 이요르가 살고 있던 동화 속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요르는 운이 좋았어요. 그렇게 낙천적이고 즐거운 푸도 이요르를 외면하지는 않았거든요. 이요르를 이해한 것도 아니고, 그저 외면하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푸는 이요르를 구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요르는 적어도 숲속 친구들 앞에서는 우울을 숨기지 않아도 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푸도 없는 이 세상에서 이 한없는 우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병을 숨기면 치명상이 되듯이, 우울증도 숨기면 치유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진단해야 합니다. 남들의 이해를 원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우울증일까요? ... 텔레비전 광고를 보다가 초기 우울 감정을 드러내는 카피를 보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비록 이런 코믹한 감정은 단 1%도 섞이지 않은 것이지만...
우울증이란 잠시 기분 나쁜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에든 흥미가 사라지고, 일상이 지겨워지며, 무기력해지는 것이 오히려 우울증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우울증은 연말연시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에 더 많이 도지곤 합니다. 유럽에선 봄에 자살률이 가장 크다고도 하지요.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이 우울하고 무기력하며 삶이 허망하다고 느낀다면 그 고독은 몇 배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지독한 고독과 무기력에 시달릴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떠들썩하고 환한 세상에서 홀로 우울한 사람이 실은 자신 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무슨 기념일이라고, 계절이 바뀌었다고 즐기기를 (그것도 가족, 커플 단위로) 강요하는 것도 사회의 부당한 압력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제각각 마음이 다르고 개성이 다르니, 똑같은 것을 느끼고 즐겨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고독을 느낄 필요는 없겠죠. 이성적으로는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해한다고 단번에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푸의 친구들이 곁에 있어줘도 결코 우울을 떨칠 수 없었던 이요르처럼, 우울증은 자신이 콘트롤 하기 힘든 엄연한 병입니다.
“난 병들었어.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는 수 없어. 난 아파.”
스스로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 우울에서 탈출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무기력과 허무는 일상을 모노톤으로 바꾸기에 충분합니다. 칼라가 사라진 세상이라 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는 있는데 그것이 너무 길어지고 심해지면 우울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밝고 명랑해서 분위기 메이커였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우울증은 이요르 같은 캐릭터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누구나 우울증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무기력과 허무는 잘 놀고 들어온 다음, 신나게 떠들고 놀고 온 후에 찾아오는 수도 있습니다.
"이걸 해서 뭘 하지?"
"이렇게 살아봤자, 나중에 뭐가 남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지금 내게 남은 건 없어."
"삶의 의미가 뭐지? 난 쓸모가 없어."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죠. 하지만 이 생각이 오랜 기간 지속되어 일상생활까지 엉망으로 만든다면, 나아가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면 그때는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회의라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아, 하루종일."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아."
"잠을 자고 싶지 않아."
"깨어나고 싶지 않아."
"술이 낫겠어. 술이 아니면 힘들어."
사람은 누구나 이런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분들 역시 오래 된다면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고민거리가 있는가보다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될 때, 고민과 정신적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며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깊이 생각하겠다며 긴 시간 홀로 있거나, 방에 틀어박혀 있거나,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기력이 길어진다는 판단이 되면 우리는 우선 몸부터 살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마음과 정신만으로 지배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정신을 좌우하는 것은 실은 몸입니다. 생물학적 인간으로서 몸을 무시해서는 결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물리적 존재인 몸은 자연에서 온 것입니다. 영양이 필요하고, 햇볕이 필요하고, 휴식과 잠도 필요합니다. 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기분 때문에 가벼이 여기면 우리의 정신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몸이 무너지고 나면, 특정한 고민거리, 정신적 방황의 요인이 사라진 뒤에도 우울증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유가 없는 우울, 봄의 세계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던 이요르와 같은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기력과 허무라는 것 자체가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숨고만 싶은 상태인데, 이런 상황에서 몸을 챙기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삼시세끼 제대로 챙겨먹고 꼬박꼬박 운동하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적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모범적인 삶을 살던 사람도 한순간 틀어박혀 몸을 잊고 살게 되면 우울증의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솔직히 말하면 죽어버리고 싶은 상황에서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이요르는 어떻게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이요르는 동화의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동화의 세계란 친구가 항상 곁에 있는 세계이지요. 아무리 우울하더라도 친구가 없어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이요르의 우울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일지라도 그들은 항상 이요르를 무리에 끼어 들입니다. 나무 구덩이에서 푸를 끌어당기도록 만들고, 원치 않는 생일파티를 열어주기도 합니다. 이요르는 귀찮아도 항상 몸을 쓸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울은 해도 고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비극은 없죠.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동화의 세계가 아닙니다. 누구나 살기가 힘들기에 우울한 사람은 인기가 없습니다. 자살자들, 아니 우울한 사람은 모두 주위에 자신이 위험하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가족들조차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죠. 우울한 사람도 고독 속에 자신을 방치해버립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정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닥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상황이 한번에 오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구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요르의 친구들처럼 우울한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 한, 실질적으로 자신을 구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습니다. 우선은 말이죠. 그렇다면 무기력과 허무가 계속 될 때, 어떻게 몸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두 개의 키워드는 "금지!"와 "매뉴얼"입니다.
금지는 시제에 관한 것입니다. 무기력과 허무가 계속될 때, '미래 시제'는 금지입니다. 모든 것이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생각이 오래될 때, 그것이 진정 "자신"의 생각일까요? 그것은 진정한 나인 '자신'이 아니라 '호르몬의 함정'입니다. 일상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수많은 무의미의 질문들은 '건강한 정신'의 것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진 호르몬 체제'의 함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는 모든 생각을 정지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것이 아니니까요. 허무는 흔히 '앞날'에 대해 생각할 때 드는 생각입니다. 인생의 의미도 자신이 살아'간' 날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살아'갈' 날들에 대한 것이지요. 그래서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 되묻는 미래시제 질문들은 금지이며, 생각은 정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매뉴얼을 실행합니다. 정신이 무너져있을 때, 긴 시간을 생각하면 좋지 않습니다. '일주일' 혹은 '오늘 하루'만 생각하십시오. 그것도 힘들면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점심 먹을 때까지', '점심 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매뉴얼을 정하세요. 그날 할 일에 대해서. 체크리스트를 정하는 것입니다.
"일어난다.-->씻는다.-->먹는다.-->외출한다(잠깐 문밖에라도)-->...." 이런 식으로요.
색연필 등으로 실행한 것을 지우셔도 좋습니다. 자신을 칭찬해주는 느낌이 들거든요.
우리는 칭찬에 인색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금메달이 아니면 별 것 아닌 걸로 치부하고, 1등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한다고 협박하하는 그런 사회죠. 스트레스가 가장 큰 사회 중의 하나가 한국사회라고 들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거창한 기준을 세우지 마세요.
'일어나는 것'을 해냈다면 스스로 이겼다고 여기십시오. 남들은 별 것 아닌 것이라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재활훈련입니다. 오래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사람이 한 걸음 걷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무기력한 정신을 일으켜세우는 것 또한 그렇게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몸을 위해 움직이는 행동 자체가 바로 승리입니다.
오늘 하루 매뉴얼에 적힌 것을 다 해냈다면 '의미가 충만'한 거라고 만족하십시오. 앞날은 생각하지 마세요. 내일도, 내일 아침도요. 기계처럼 매뉴얼대로 움직입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정신은 완전히 무너졌더라도 몸을 위해, 몸만 생각하면서 매뉴얼대로 사는 기계가 되십시오. 그렇게 하루하루의 몸에 집중해서 살다보면 무기력은 어느새 사라졌을 것입니다. 금지되었던 것을 하나씩 허락해도 되는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무기력이 사라진 때 드는 생각들이 바로 '건강을 되찾은' 자신의 생각입니다. 호르몬의 함정에 빠지지 마세요. 몸이 건강해진 후에 드는 생각만이 ‘자신의 생각’이라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많은 부분이 몸에 지배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몸을 존중하는 법에 대해 너무 배운 것이 없습니다. 몸은 자연이고, 자연에는 리듬이 있지요.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는 것이 리듬입니다. 때가 되면 영양물을 섭취해야 하는 것도 리듬이지요. 기계처럼 움직이는 매뉴얼은 제 생각엔 이 리듬을 회복시키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몸과 리듬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고귀한 정신인데!'라는 거부감이 들겠지요. 하지만 속는 셈치고라도 ‘금지’와 ‘매뉴얼’을 실행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악마에 혹했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매뉴얼대로 한 달을 실행했는데도 허무, 무기력, 우울, 자살충동 등이 해결이 안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병입니다. 병원에 가셔야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정도 매뉴얼로도 해결될 것입니다. 자신을 파괴하는 목소리에 속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어른이 되어 읽기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은 이요르 같은 친구에게서 선물받은 책이었습니다. 우울증에 대해서는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통해 아는 것과 움직이는 것 사이에는 꽤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이 병이며, 뇌의 장애라는 것을 알았던 그 시기에도 병원에 가는 것, 약을 먹는 것을 최후의 보루 내지는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울증이 병이라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우울증을 앓았던 저자는 사회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고 말합니다.
'의지로 이겨내라.'
'그렇게 약한데 무슨 일을 하겠느냐?'
저자는 이런 말들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나, 혹은 민감한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폭력이며 자신 스스로를 옥죄는 저주라고 말합니다.
'분석하면 우울증의 원인을 찾을 수 있고 나을 수 있다.'
'충격적인 사건이 우울증을 일으킨다.'
앤드류 솔로몬은 이런 생각이 우울증에 대한 '대단히' 잘못된 신화라고 지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게 하는 저주와 신화이기도 하죠.
이 책은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지만, 우울증을 겪은 사람들이라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자신의 정신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아주 심각한 상태까지 겪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 다른데, 이는 마치 우울증에 대한 진단표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울증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는 사적이고도 공적인 책이라는 말입니다.
저자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독자는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인해 어떤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이르렀을 때, 때를 놓치면 안 되는지도 알게 됩니다. 이 책의 저자는 호소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몰락하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우울증은 뇌에 생긴 병입니다. 병에 약을 쓰듯이 우울증에도 약을 써야 합니다. 개인의 의지를 비난하지 마십시오.’
이요르와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삭막하고 외로운 어른의 세계에서 사는 우리들은 언제나 정신이 몰락하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요르가 아닌 사람들은 다함께 돌아가면서 푸가, 피글렛이, 티거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이 우울증은 특정인만 걸리는 병이 아니니까요. 주변에 한 사람이 자살하면, 이제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 위험군에 속하게 됩니다. 우울증은 참 전염되기 쉬운 병입니다. 인간이 그렇게나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는 척해주면 우리는 결코 누군가를 놓치지 않아도 됩니다. 어쩌면 훨씬 행복해질 수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