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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 Feb 20. 2020

번아웃의 당신께

- 자신만의 삶의 의미 찾기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 지음, 최순희 옮김, 시공사

모두가 일하는데 한 명만 햇살을 쬐며 놀고 있습니다. 다들 흘깃흘깃 지나갑니다.

"넌 왜 일을 안 하니?"

"나도 일 하고 있어. 추운 겨울날을 대비해 햇살을 모으고 있는 중이야."

어른들이라면 웬 프리라이더냐며 주먹이라도 오가는 활극이 펼쳐지겠지만  어린이 대상의 책은 좀 다릅니다. 아, 이솝 시대부터 근세 시대까지는 제외하고요.

아이에게 좋은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은 엄마아빠들, 이모, 고모, 삼촌들은 이미 다알고 있을 책 한 권을 소개할까 합니다. 아마도 결코 잊지 못할 독서 체험이었을 겁니다. 아이들이 아니라 읽어준 어른들에게요. 정작 아이들 반응은 평범했겠지요. 하지만 모처럼 시간 내서 좋은 어른 노릇을 한다고 무릎에 책을 펼치고 읽다가 뒤통수 한 대를 탁 맞는 기분을 느꼈을 분들이 많을 겁니다. 눈물이라도 핑 돌지 않았다면 다행이구요...


위의 책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의 귀여운 생쥐의 이름입니다.

이솝 우화 중의 하나인 <개미와 베짱이>가 생각나는 이 책은 노동과 삶의 의미에 대한 이 사회의 강요를 뒤집어버립니다. 눈이 반쯤 감겨있는 이 귀여운 프레드릭과 봄, 여름, 가을 동안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라고 묻는 친구 생쥐들이 말이지요.

어떤 강요냐구요?

우리가 늘 강요받았던 메시지들이죠.

죽을 때까지 일하고,

일터에서 보람을 찾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반성을 하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늘 불안해하라는 메시지.

가령, 에디슨의 이런 말들..


 건강에 대해서 무지했던 이런 사람들의 말은 여전히 노동자 앞의 경영자들, 좋은 진학률을 내야 하는 학교와 학원들,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명언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내일 아침 시험이라도 눈꺼풀의 무거움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어서 어느 순간 지치고 말 때가 있지요. 지치면 쉬면 될 텐데, 이 강요된 협박이 우리 머리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는지라 죄책감과 우울감이 함께 옵니다. 일의 능률도 없고, 성과는 저하되는데, 쉬지도 못하고.... 쳇바퀴처럼 안 좋은 상황이 계속됩니다. 이 내리막길로의 주행은 가속을 더하다가 불이 붙어버려서 결국 펑 터지고 말지요. 번 아웃. 너무 열심히 일해서 영혼까지 타버린 후에는 그 병을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이고, 비타민으로 막을 감기를 입원까지 하는 격이죠.   

 그래서 번아웃에 이르기 전에, 우리를 강요하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곳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아우슈비츠 입구/출처: 픽사베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말이죠. 아마도 명언이라며 어떤 인사말 같은 데 인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선의 북학파가 양반 귀족들을 향해 일갈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마라."라는 말과 비슷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 말은 바로 아우슈비츠 정문에 걸린 말이었습니다. 나찌가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으며 경고를 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노동은 결코 유태인들을 자유롭게 하지 않았고, 노동력이 사라진 후에야 가스실에서 그 생명을 다하였다는 것을 말이죠.

하지만 이 말의 출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한 권의 책을  읽기 전에는 이 유명한 말이 아우슈비츠 정문에 써 있었을 줄은 몰랐죠.


아우슈비츠에 있던 사람들은 저 말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요?

노동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나요?



 "우리도 어느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거짓된 표어에 휘둘려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략) 인간다운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에토스에서 각자가 눈을 뜨고, 생명체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삶을 모색해야 한다.

     -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미야 간지, 북라이프, 103~105


중증이든 경증이든 번아웃을 앓고 있는 우리들에게 치료의 기회를 주는 책들은 참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프레드릭>을 읽어준 어른들은 그 자체로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좀더 직접적인 안내서가 필요한 분들에게는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가 아주 좋은 책이 아닐까 합니다.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 한나 아렌트, 폴 라파르크 등을 인용하며 자본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노동을 노예화시켰는지, 삶을 관조해가며 자신의 삶과 유리되지 않은 노동을 향유했던 인간이 어떻게 일과 효율에 짓눌리게 되었는지 알려줍니다.



자본주의 문명이 지배하는 국가의 노동자 계급은 기묘한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 광기가 개인과 사회에 비참한 재난을 불러일으켜 지난 2세기 동안 가엾은 인류를 줄곧 괴롭혀왔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사랑, 즉 각 개인뿐만 아니라 그 자손의 활력을 고갈시키는 노동을 향한 목숨 건 열정이다. 사제도, 경제학자도, 도덕가도 이러한 정신 나간 생각을 저지하기는커녕 노동을 최고의 신성한 가치로 떠받들어왔다. 유한한 인간의 몸으로 자신들이 추앙하는 '신'보다도 위대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같은책, <<게으를 권리>>, 폴 라파르크, 재인용, 98



노동과 효용에 압박을 받은 인간은 '쓸모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간에 대해 죄책감을 느낍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이죠.

그렇기에 생산적인 일(=노동)을 하지 않는 모든 시간은 삶이 아니라,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시간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인간은 무엇을 증명하거나 성취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효용이 있는 존재라면 태어날 때 사용설명서라도 지녀야 했겠죠. 우리가 노동을 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목적과 방법이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옛 지혜인 <우파니샤드>에서는 이러한 혼동을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죠.


외적인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혼의 어둠 속에 빠진다.
내면세계만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진다.
외적인 세상만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위의 길을 간다.
내면세계만을  실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혜의 길을 간다.
그러나 행위와 지혜,
이 두 길을 결합하여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위를 통해 죽음의 바다를 건너고
지혜를 통해 불멸에 이른다.
이것은 옛 현자들의 가르침이다.

                                  - <우파니샤드>, 정창영 편역, 무지개다리너머, 217-218


우리는 불멸을 통해 나아가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일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죠. 더구나 어떠한 프로젝트의 소모품이 되어 불에 탈 정도로 닳아없어지다가 교체되기 위해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며, 삶은 공장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간과 공간, 그 모든 궤적이 바로 삶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확인시켜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는 것은 결코 가치 있는 일을 이뤄서가 아니라 '마음=몸'이 다양한 일을 맛보고 행복을 느낌으로써 실현된다. (...) 진정한 자신은 어딘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마음=몸'을 중심으로 한 생명체로서 자연스러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옴으로써 달성된다.

                                              -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132



그리고 열심히 놀면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라고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리면 정신이 쇠약해질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도 쇠약해져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빅터 플랭크의 말 재인용, 같은 책, 9~10쪽


한때 '쿨'하다는 말이 유행이었죠. 또 '진지충'이라는 말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는 것을 멋지다고 포장하고, 자신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려 느리게 행동할 때 비난하는 말이죠. 그리고 이런 유행어는 광고와 효용성을 강요하는 집단에서 만들어져 퍼집니다. 노동과 효율이 중요한 곳 말이에요.

이 책에서는 인생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을 비웃는 사람들을 '르상티망'이라고 진단합니다.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맞닥뜨릴 용기가 없어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자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에 휩싸인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내가 지옥에 빠졌으니, 너도 함께 가자는 그런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무의미한 원한에 휘둘릴 필요는 없지요.



"살아가는 의미를 묻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라는 냉소적인 말도 여기저기서 들려오기에 실존적인 고뇌를 안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곤혹스럽기만 하다. 이러한 말은 대개 예전에 한 번은 살아가는 의미를 물어보았지만 결국 그 해답을 얻지 못해 좌절한 사람들이 퍼뜨리는 것이다. 실존적인 물음에 좌절한 그들의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 시기 또는 질투를 뜻하는 니체의 용어-옮긴이)은 질문 자체를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한 실존적인 물음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기 마련이므로 허무주의적 발언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같은 책, 15쪽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의 책입니다. 철학자나 에세이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의 작가가 정신과 의사라서 저는 더 많은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번아웃은 명백히 정신의 병이기에, 좀더 권위있는 말들이 필요하니까요.

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끝까지 추구해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신과 의사라서 좀더 위안이 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의 <나의 개인주의>를 통해 그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해줍니다.



출처: 동이한옥학교 블로그



"아! 여기에 내가 나아갈 길이 있었구나! 드디어 찾아냈도다! 이러한 감탄사를 마음속에서 외칠 때, 당신들은 비로소 안도할 것이다. (....)만약 도중에 안개나 아지랑이를 만나 고뇌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 여기다' 하고 찾아낼 때까지 가면 좋을 것이다. (...) 그러므로 만약 이 중에 나와 같은 질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부디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 마라지 않는다. 만약 그곳까지 갈 수 있따면 여기에 내가 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생애 최고의 안도감과 자신감을 얻게 되리라고 믿는다.

                                     _<<나의 개인주의 외>>, 나쓰메 소세키, 재인용, 같은 책, 116-117



우파니샤드에서는 무슨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육체의 상태가 변하듯,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영혼이 변화한다고 말합니다. 일에 지쳐 무기력해진 우리는 그래서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명상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지만, 그것이 익숙하지 않는다면 좋은 책, 좋은 그림도 큰 도움이 되겠죠. 마음이 고요해지면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처럼 아주 당당하게 햇살과 색깔을 모으며 나도 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프레드릭의 친구들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친구에게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해줄 수 있겠죠.


 너는 시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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