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육아어린이집에 가기까지
아이는 언제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을까?
기를 쓰고 어린이집 대기 예약을 걸어놓고도 작은 아이를 바라보면 싱숭생숭한 마음이 든다.
선생님이 아이를 잘 봐주실까?
원에서 주는 밥을 잘 안먹으면 어떻하지?
친구를 잘 못 사귀면 어쩌나?
맨날 엄마를 찾으며 징징거려 미운털 박히면 안되는데..
뉴스에 나오는 학대사건이나, 위생, 급식 사고가 우리 아이의 일이 되면 어떻게 해야하지?
걱정이 꼬리를 꼬리를 물어 나의 심장까지 물어버린다.
너무 어린애를 나의 편의 때문에 너무 일찍 기관에 보내나?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엄마인가?
그냥 조금만 더 가정 보육할까?
기관생활을 시작하는 적정한 개월수는 언제일까? 친구들은 언제부터 보냈지?
100일? 6개월? 돌? 두돌?36개월? 다섯 살? 최대한 오래?
큰 아이가 여섯 살이 된 지금의 나는 위와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에게 아주 확고한 답을 한다. 보내야겠다 생각이 들었을 때 라고.
아이를 기관에 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면 애초에 고민 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집마다, 부모마다, 아이마다 다양한 사정과 상황이 있다.
맞벌이, 주양육자의 복직, 질병 등의 신체적 이유, 출산, 육아가 힘든 상태, 무엇을 위해서든 자기 시간이 필요해진 모든 양육자.
내가 있어야 아이가 있을 수 있다. 소모적인 죄책감은 나를 더 갉아먹을 뿐이다.
왜 나는 그때 이 마음을 못 가지고 죄책감을 지고서 아이를 원에 보냈는지...
18개월 차이의 연년생 아이를 키우게 된 나는 첫째 아이를 반나절씩 가정형 어린이집에 보냈다. 많은 정보 없이 가정형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든지 내가 아이를 데리고 올 수 있다 라는 마음이 깔려있었다. 물러설 곳이 있었다. 그 물러설 곳이 나를 희생시키는 것일지라도.
내가 첫 아이를 보낸 가정형 어린이집은 영아로만 구성되어있었다. 아이가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한 만0세에는 담임교사 1명에 영아 3명, 만1세에는 교사 1명에 영아 5명, 만 2세에는 교사1명에 영어 8명이었다. 교사 1명에 자박자박 걷기 시작한 영아 3명을 돌본다고 상상하니 쉽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신생아를 안고 있는 나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우리 아이는 10개월부터 걷고 돌무렵엔 뛰어다녔으나 어린이집에 가면 유모차를 태워 산책을 시켜주었다. 걷고 뛰는걸 좋아하고 답답함을 잘 느끼는 아이가 유모차에 앉아있는 사진을 받아 볼때면 죄책감이 느껴졌다. 다행히 어린이집 원장님은 배포가 크시고 실제 운영에 많은 일들에 관여를 하시며 특히 먹거리와 위생환경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이셨다. 급식 조리사 선생님도 “냠냠 선생님”이라는 별칭으로 급식 조리시간 전후로 아이들과 즐겁게 상호작용을 해주셨고, 아이의 담임선생님도 경력이 많으시고 아이들을 위한 촉감 활동과 만들기 활동을 많이 준비해 주셨다.
문제는 우리 아이었다. 신생아시기부터 예민하고 잠이 얕았던 아이. 그리고 이유식까지는 훌륭하게 하다가 동생을 보면서 곡기를 끊고 엄마에게 찰싹 달라붙는 아이. 우리 아이는 어린이집에 들어가며 일년 반동안 울며 들어가고 점심은 먹지 않았다. 점심을 먹지 않은 아이이기에 나는 아이를 오랫동안 맡길 수 없었다.
그러다 갑상선기능저하증, 하지정맥류 등으로 내 몸이 더 피폐해지고 나서야 나는 아이를 더 긴 시간 어린이집에 머물게 했다.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은 불행해 보였다. 산책이라고 해봐야 유모차에 태워져 아파트 단지를 30여분 돌다 들어오는 일이 전부였다. 달달한 간식은 조금 먹고 점심은 먹지 않았다. 낮잠도 울다 지쳐 잠들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아이를 찾았지만 잔뜩 지쳐있고 화가 난 아이를 다시 맞이하는 일은 곤욕스러웠다. 그래도 어린이집에 계속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원장님도, 냠냠선생님도, 담임선생님도 우리 아이를 예뻐하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0세부터 보냈던 어린이집이기에 만 1세에 교사 1명에 아이가 다섯이라는 것이 신경쓰였고, 만 2세에 교사1명에 아이가 여덟이라는 것이 신경쓰였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계속 보냈다. 이렇게 우리 아이를 예뻐하는 선생님들이 계시는 어린이집에서도 아이가 밥도 안먹고, 낮잠도 힘들어 하며 다니는데 아이를 다른 어린이집에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이가 내 교육 철학과 맞는 기관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발도르프 어린이집, 숲 어린이집,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찾아가 상담도 받고 체험 수업에 참가해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보내고 싶은 기관은 셔틀버스가 없었고 내가 돌도 안 지난 갓난 아이를 엎고 이제 두돌이 막 지난 아이를 안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등하원 시킬 수가 없어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살고 있던 집의 전셋집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가야할 상황이 생겼지만 아이에게 다른 어린이집을 적응시키는 무리수를 두지 않기 위해 몇 억의 빚을 내어 나는 단지내에 머무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내가 급할 때마다 손을 빌려주는 친정집 옆을 떠날 용기가 나지 않는 것도 한 몫을 했다.
아이도 아이였지만 나의 영혼은 계속해서 곤두박질 쳤다. 아이만 생각하는 일상에서 내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몸은 매일 아팠다. 나는 계속해서 곤두박질치는 나를 찾기 위해 일을 하려고 시도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도 해봤지만 외벌이에 두아이를 키우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쪽으로 나를 찾기 힘들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자니 아이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영아 두 명을 키우는 상황에서 어린이집에 아이들이 가지 못하는 날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감기, 수족구. 노로바이러스. 중이염, 아데노이드바이러스, 기관지염. 나는 결국 친정엄마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다정한 편은 아니었지만 내가 무언가를 부탁했을 때 거절했을 때 원망을 듣지 않기 위해 내가 손을 빌릴 때마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첫째 아이가 만 3세가 되었다. 아이가 다니던 집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고, 집 계약도 만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