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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Mar 19. 2024

콩의 누명

오래 쌩쌩하게 살고 싶다면 채식 비중을 높여야 된다는 뉴스를 수시로 듣는다. 과연 초고령화 진행 속도 1위 국가답게 역노화 콘텐츠가 인기다. 십 년 전만 해도 건강 뉴스는 바로 스킵했는데 요새는 그냥 잠잠히 듣는다. 나름 재미가 있다.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최근 들어  한국 사람의 평균 수명은 늘어났지만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아니다. 간병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기간이 굉장히 늘어났다. 육십 대부터 병원에 누워 구십까지 산다면 좀 괴롭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의료 기술의 도움으로 목숨만 이어가는 인생은 솔직히 달갑지 않다.


인스턴트, 초가공, 육식을 즐기는 MZ 세대의 신체건강이 부모님 세대보다 나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한 염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기농 채소와 과일값이 폭주하듯 치솟고 있다. 지난 설에 A급 사과 한 알에 만 원에 파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대신 햇반이나, 라면, 편의점 도시락의 가격은 상승폭이 크지 않다. 그러니 지갑이 얇은 사람들이 간편식과 가공식품에 몰릴 수밖에. 식사 준비에 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기 힘든 사람에게 신선한 고급 재료로 매끼를 챙겨 먹으라 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렇지만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훌륭한 대안이 있다. 바로 콩이다. 콩은 아무 데서나 잘 자란다. 논두렁에서도 벼 옆에서 씩씩하게 자란다. 척박한 땅에서도 환경을 탓하지 않는 콩은 뿌리에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이 있다. 천연 비료 효과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이다. 콩 심은 자리에 다른 작물을 심으면 또 잘 자란다. 맛있고 건강에도 좋으며, 땅도 튼튼하게 만드는 어메이징 한 작물이 콩이다. 게다가 값도 저렴하다. 슈퍼 푸드인 두부와 청국장을 소득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다니. 이렇게 보면 한국도 참 괜찮은 나라다.


현재 나는 강릉에 산다. 계속 여기에서 살고 싶다. 현재로서 나는 그렇게 희망한다. 강릉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음식이다. 감자옹심이도 쫄깃하고, 장칼국수도 얼큰하고, 막국수도 시원하고 다 좋다. 그러나 소울 푸드 원픽은 단연 두부와 청국장을 비롯한 콩 요리다. 뜨끈뜨끈한 순두부 한 그릇에 간장을 살짝 풀어 한 숟갈 뜨면 온몸이 채워진다. 자글자글 끓여내는 매콤한 두부전골은 또 어떻고.

 

처음부터 두부에 빠져든 것은 아니다. 어린이 시절에는 콩밥이라면 질색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십 대 중반까지 나는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콩을 먹으면 에스트로겐이 마구마구 분출되어 여성스럽게 변한다는 오해를. 말도 안 되는 오해가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바로 여자처럼 가슴이 튀어나오는 '여유증'에 걸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콩 포비아였다.


비합리적인 나도 어찌저찌 임용고사에 패스하게 되었다. 2009년 봄이었다. 첫 발령지는 강릉. 대학 신문사 캠프 활동으로 한 번 와본 것이 다인 도시였다. 훗날 내가 여기에 뿌리를 내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왕좌왕하며 첫 제자들과 지내던 중 과학 교과서에 신기한 활동이 등장했다. 바로 두부 만들기. 단백질의 응고를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학교가 위치한 포남동은 두부로 유명한 초당동 바로 옆동네였다. 콩물을 구하기 어렵지 않았다. 골목 하나 돌면 두붓집이 서 있었으니까. 학교에서 수업 재료 구하러 왔다 하니 사장님은 간수까지 넉넉히 챙겨주셨다. 수업 시간에 얼기설기 만든 두부는 정말 맛있었다. 마치 목장에서 생 모짜렐라 치즈를 갓 뽑아서 입에 넣을 때의 뜨겁고 담백한 맛. 두부의 고장 어린이들이 챙겨 온 간장을 뿌려가며 냠냠 맛있게 먹었다.


과학 실험은 끝났건만 나는 두부를 자주 먹게 되었다. 강릉 시민의 식단에서 두부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은 듯했다. 회식이나 가벼운 직원 모임에 두부가 빠지지 않았다. 춘천교대에 다닐 때 닭갈비를 수시로 먹었던 것처럼 강릉에서는 두부를 먹었다. 학교 막내였던 나에게 밥값을 내라는 선배는 없었다. 나는 사주는 사람이 가자는 대로 두붓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


공포의 여유증을 떠올리면 선뜻 내키는 메뉴는 아니었으나 얻어먹는 처지에서 음식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잊을만하면 에스트로겐이 떠올랐다. 한 번은 어떤 남자 부장님과 두부전골집에서 동석하게 되었다. 부장님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성적으로 전골국물을 떠먹었다.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감탄이 튀어나왔다. 저분은 아이를 다 낳아서 가슴이 튀어나오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으신가 봐. 다시 생각해 보아도 멍청한 감탄이었다.


내 몫으로 나온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는 편인 나는 두부를 몽땅 해치웠다. 그런던 중 운명의 이벤트가 찾아왔다. 어느 날 거울을 봤는데 가슴이 살짝 커져 보이는 것이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설마 콩 부작용! 당장 인터넷 검색을 돌렸다. 두부 에스트로겐 부작용.


나와 유사한 걱정을 안고 있는 분들이 많은지 검색된 자료가 풍부했다. 외국 학술지 및 공신력 있는 기관의 데이터를 인용한 자료 위주로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콩 여성화 현상은 사실무근이었다. 콩에 들어있는 식물성 여성호르몬인 이소플라본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았다.


정력이 감퇴할까 봐 걱정하는 남자들을 위해 성 기능 관련 설명도 딸려 있었다. 콩은 성기능 저화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내가 거울을 보며 착각했던 것은 단지 살이 쪘기 때문이었다. 무식하면 어리석은 불안으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콩 요리는 모든 것이 과잉인 시대에 그나마 절제하지 않고 많이 즐겨도 무방한 음식이지 않을까. 하루에 한 끼 청국장 먹고 몸이 망가졌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술안주로 두부 김치를 즐긴다고 해서 치킨보다 속병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는데, 과거보다 피부 트러블이 줄었다.


어허 이것 참, 이상하게도 콩 생각을 하면 자꾸 칭찬을 하고 싶다. 크기가 작고 귀여워서 그런가 칭찬을 잔뜩 해도 우쭐대거나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콩 자체에 뭔가 '절제'라는 기운이 스며들어있는 기분이 든다. 콩은 참 좋은 녀석이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오늘 아침에도 밥에서 쏙쏙 골라낸 딸내미들의 검은콩을 매일 대신 먹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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