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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Apr 29. 2024

오래된 회색 스웨터와 의류비 십만 원

4월의 마지막 일주일을 남기고 겨울 외투를 세탁소에 맡겼다. 우리 부부의 코트와 패딩점퍼 세 벌을 드라이클리닝 하는데 들어간 돈은 6만 원. 삼 주 뒤에나 찾으러 오라는 말을 들었다. 급할 건 없었다. 그저 이맘때 겨울 옷을 깨끗하게 정돈하여 보관하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세탁소에 머문 짧은 시간에도 분주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직원들은 쉴 새 없이 다림질을 하고 비닐 커버를 씌웠다. 세탁소의 봄 풍경은 맹렬한 기계음과 라디오 신청곡이 뒤섞인 세계였다.


외투를 정리하는 김에 겨울 상하의도 모두 갈무리하기로 했다. 집에 울샴푸가 있으면 편하다. 거칠게 입는 스포츠용 패딩점퍼는 물세탁 전용 세제와 함께 세탁기에 넣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막 입는 패딩마저 세탁소에 맡기면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 말끔해진 옷들을 차례로 베란다 건조대에 널었다. 매서운 강원도의 겨울을 견디게 해 준 모직 목폴라 니트와 도톰한 코듀로이 바지가 봄 햇살 아래 놓였다. 이제야 역할을 다 끝냈다는 홀가분함이 옷감에서 묻어났다. 지금부터는 동계 의류의 휴가 시즌이다.


수납함에서 반년 간 잠들어 있던 봄옷을 꺼냈다. 분명 꼼꼼히 세탁하고 잘 말려 보관하였는데도 어딘가 칙칙한 기운이 풍겼다. 장시간 바깥공기를 쐬지 못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나는 반소매 면티셔츠와 통기성이 좋은 바지를 하나씩 옷걸이에 걸었다. 구김이 간 부분은 다리미로 스팀을 분사해 폈다. 뜨거운 김이 닿자 옷감이 살살 되살아났다. 행거가 봄의 모습을 갖췄다.


옷걸이를 훑어보았다. 추가로 구매할 옷은 없었다. 작년에 산 청바지는 여전히 잘 맞고, 신발도 닳지 않았다. 쇼핑에 진을 빼지 않아도 된다. 우리 부부는 한 사람당 일 년 의류비가 이십만 원이다. 연초에 한꺼번에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반기 하반기로 반씩 나누어 쓴다. 현금을 따로 주지는 않고 원하는 의류나 잡화를 구입하면 생활비에서 지원하는 방식이다.


십만 원 안에는 신발과 가방, 양말, 속옷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만일 개인적인 선호로 옷을 더 사고 싶으면 생일이나 기념일 선물로 받거나 용돈에서 해결한다. 그렇지만 용돈까지 사용하는 경우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한 달에 삼십만 원인 용돈으로는 해야 할 것들이 무척 많다. 책을 사 봐야 하고, 영화나 게임을 즐기거나, 모임에 참석 비용을 대야 한다. 용돈으로 옷값까지 치르기에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우리 부부는 대부분의 옷을 시즌 오프 상품으로 구매한다. 혹은 멤버십 데이나 특별 프로모션을 기다린다. 제값을 주고 신상을 사는 일은 손에 꼽는다. 마트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양배추와 감자가 절반 가격에 나오듯, 신상으로 출시된 옷도 시간이 지나 매대에서 밀려나면 가격이 떨어진다. 1년 차, 2년 차, 3년 차. 3년 차 이상부터는 기본 50% 이상 할인이 적용되고 80%에 육박하는 제품도 종종 있다. 특히 내가 즐겨 입는 엑스라지 사이즈의 경우에는. 시즌 오프의 매직이다.


우리는 단순한 디자인에 소재가 괜찮은 옷을 입는다. 유행을 거의 타지 않는 제품들이다. 내가 좋아하는 면 소재 스웨터와 바지는 물세탁을 해도 변형이 거의 없다. 한 번 사면 입는 동안 내 체형에 맞추어져 편안해질 뿐 아니라 내구성도 뛰어나다. 섬세하게 관리만 잘해주면 질리지 않고 입을 수 있다.


나의 머릿속에는 가상의 옷장이 존재한다. 새로운 아이템이 들어오려면 가상의 옷장에 공백이 발생해야 한다. 예컨대 니트 상의는 다섯 벌로 구성되어 있다. 와인색 꽈배기, 굵게 짠 양모 두툼이, 밝은 회색 캐시미어, 촘촘한 조직의 검은 코튼, 도톰한 아이보리. 꼭 이래야 한다는 특별한 기준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항목으로 채워 넣고 있다. 나는 옷의 개수가 적더라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옷이어야 즐겁게 옷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집에 물건이 쌓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카테고리별로 수량을 제한해서 내가 좋아하는 물건을 추려서 보유한다. 어딘가 과한 느낌이 들면 과감하게 정리해 버린다. 지인에게 물려줘도 좋을 만큼 양품이면 의사를 물어본 후 나눠주고, 아니면 의류수거함에 세탁해서 넣는다. 그렇게 하면 가정의 물건 밀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


중고 옷도 싫어하지 않는데 덩치가 커서 좋아하는 핏으로 잘 맞는 사이즈가 흔하지 않다. 다만 아버지 옷은 가끔 물려 입는다. 대부분 운동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모임에서 단체복으로 지급받은 스포츠 저지 외투다. 나보다 키와 체중이 조금씩 더 크고 많이 나가는 아버지는 단체복이 맞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 아버지 몸에 너무 꽉 끼는 옷은 웬만하면 나에게 딱 맞다. 단체복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데상트, 퓨마, 네파 같은 브랜드 제품에다가 단체 이름도 새기지 않기 때문에 꺼릴 이유는 전혀 없다.


옷걸이에 단정히 걸려있는 옷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양이 너무 많아서 상자에 넣어두지 않아도 되고, 한눈에 이것은 내 옷들이다 하고 쏙 들어온다. 사람이 유의미하게 관계 맺을 수 있는 인맥의 범위가 최대 150명까지라고 한다. 옷도 비슷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지나치게 다량의 옷을 사면 관계 맺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이 옷, 내일은 저 옷 하면서 365일 새로운 코디를 낙으로 삼는 분도 있겠지만 둔한 나는 손가락, 발가락 개수 안으로 수량 파악이 가능한 상태가 편하다.


어제 입은 회색 면 크루넥 스웨터는 10년이 된 옷이다. 역시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면 100% 스웨터로 미들 게이지 굵기다. 자잘한 요철이 느껴지는 감촉이 부드럽다. 특히 니트 특유의 붕 뜨는 실루엣이 없어서 몸에 자연스럽게 얹힌다. 밑단과 소맷단에 립이 적용되어 살짝 모양을 잡아준다. 그러나 하도 오래 입으니 소맷단은 탄력이 약해졌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받치고 있으면 조금 내려올 것 같은 느낌도 난다. 그래도 나름 헐렁한 건 헐렁한 대로 마음에 들어서 계속 입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서 찍은 사진 속에는 이 녀석이 자주 등장한다. 옷도 세월을 따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회색 면 스웨터는 언제까지 나와 함께 하게 될까. 건조대 가장 앞자리 세 칸에 니트를 탁탁 털어 널찍하게 눕혔다. 유니클로 대량 생산품인 주제에 어쩐지 나는 얘가 헤지스 캐시미어 니트보다 더 마음에 든다. 뭔가 걸리는 것이 없고 느긋하고 가벼운 심정으로 입게 되는 나의 올드 스웨터. 부디 오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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