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엑스트라 스트롱 샴푸
세상의 남성을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면 나는 '풍성남'과 '드뭄남'으로 나누고 싶다. 모발이 풍부한 남성과 모발이 드문 남성 이렇게 말이다.
나에게 대머리는 원초적 공포에 가깝다. 태어나자마자 나는 알 수 있었다. 같은 집에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는 가운데 머리가 없으셨다. 팔십 대 무렵에는 양옆으로 귀 쪽으로만 조금 남아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 정수리가 매끈한 줄 알았다. 그러나 생에 마지막 순간까지 풍성한 모발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분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크게 놀랐다. 세상은 넓고, 풍성남은 흔했다.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의 형제 분들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다 같이 사진을 찍으면 반짝반짝 치즈. 정수리부터 시작하여 점차 미끈한 영역이 확장되는 경향은 인생의 깊은 내리막길처럼 끝없이 지속되었다. 이른바 두피의 사막화.
'사막화'의 진행은 이마와 정수리 두 부위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일단은 이마. 이마는 위로 그리고 다시 옆으로 끝없이 영역을 넓혀 나갔다. 슬금슬금 점점 후퇴하는 형국이다. 더 이상 후퇴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까지 후퇴하는 것이다.
이마가 뒤로 물러나는 방식이라면 정수리는 호수에 던진 돌이 파문을 일으키듯 대머리의 동심원을 키워간다.
우리 아버지는 삼십 대 중반부터 머리가 희어지시더니 오십이 넘어서부터는 급격히 정수리 '사막화'가 진행되셨다. 나와 동생은 철부지 어린 시절 아버지의 머리가 점점 비어가는 모습을 보고 '헬기 착륙장'이 생기겠다고 놀리기도 했다.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뿐이다.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내 주제도 모르고 까불었다.
아버지를 놀리던 나는 스무 살이 되고 나서야 위기를 실감했다. 대학에 갔더니 정말 강력한 '탈모 유전자'를 가진 형들 중 일부는 머리가 눈에 띄게 없었다. 탈모인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모발이 상할까 봐 염색이나 탈색처럼 두피에 부담을 주는 화학 약품이 들어가는 시술을 하지 않았다.
'아, 밀도가 낮다는 것은 저럴 때 사용하는구나. 참으로 안타깝다.'
반면 '풍성남'의 축복받은 유전 인자를 물려받은 형들은 자유 그 자체였다. 호일 펌을 하기도 하고, 초록색으로 머리를 물 들였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재염색을 하곤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모발이 손상되기도 했지만 아랑곳 않았다. 어차피 머리카락이란 건 무한히 재생되는 천연자원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했다. 모발 사치라고나 할까.
부자가 거지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든 법이다. 물 쓰듯 머리카락을 함부로 대하는 ' 풍성남'을 보며 부러운 마음이 드는 한편 위기감이 들었다. 아직 탈모나 대머리의 전조증상은 없지만(다행히 모계 유전자는 풍성 그 자체이다) 강력한 아버지 계통의 역사가 있지 않은가.
'언젠가 나도 빠진다고 가정해야 한다. 유비무환!'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비 대머리'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나마 있는 터럭이라도 최대한 지켜보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검은콩 자반을 챙겨 먹었고, 샴푸는 반드시 괜찮은 성분으로 만든 탈모 예방 기능성 제품으로만 골랐다. 다행히 과도한 탈모 예방책으로 인해 만 삼십팔 세에도 대머리는 시작되지 않고 있다.
유명한 탈모 샴푸 라인업은 모두 써 본 것 같다. 닥터 그루트, TS 샴푸, 닥터포헤어, 려, 닥터 시드 등. 최근 내가 집착하고 있는 샴푸는 '그래비티'다. GRABITY, 중력이 아니라 GRAB! 꽉 잡겠다는 샴푸다. 모발이든 자존감이든.
그래비티는 카이스트 창업 팀에서 시작한 제품이다. 탈모 커뮤니티에서는 꽤 유명세를 치른 제품이었고 14차까지 완판 매진 행렬을 이어갔다. 나는 기존에 쓰던 샴푸가 남아있어 끝까지 안 쓰고 버티다가 새해에 모발이 가늘어진 것 같아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기존 샴푸는 의외로 아이들에게 잘 맞고 좋아해서 끝까지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래비티는 내가 사고 싶다고 해서 바로 살 수 있는 샴푸가 아니었다. 지금은 물량이 풀렸지만 내가 알아볼 당시에는 '엑스트라 스트롱' 버전이 모두 품절이었다. K-뷰티 원조 국가에서 샴푸를 못 산다니, 얼마나 물건인 거야.
그나마 네이버 스토어에 입점한 폴리페놀 팩토리 공식 라운지에 가입하면 30밀리미터 체험판을 구매할 수 있었다. 체험 미니미 샴푸는 단돈 백 원. 배송비까지 3600원밖에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 아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체험판 샴푸를 결재했다.
그간 숱한 샴푸를 거쳐왔기에 큰 기대는 없었다. 탈모 마케팅의 세계는 거대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다. 모두가 과장 일색이다. 카피 라이트는 또 어떤가. 당장이라도 머리가 북슬북슬 해 진다는 둥 '사기와 기만'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다.
무심하게 택배 포장을 뜯었다. 앙증맞은 사이즈의 연두색 그래비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엑스트라 스트롱이라니. 과연 허풍이 심한 탈모계 상품답다. 바로 머리를 감아보았다.
오백 원 사이즈로 샴푸를 짠 후 머리에 문질렀다. 몽글몽글하고 쫀쫀한 거품이 금세 뭉쳐졌다. 크림 같은 질감이었다. 풍성한 촉감을 지향하는 회사답게 거품의 질이 양호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품을 씻어낸 이후다.
여러 번 물로 헹구어 냈다. 머리카락이 뻣뻣했다. 원래 탈모 라인업의 세정력이 강한 편이긴 하다. 두피의 기름기를 훌훌 날려버리는 세팅이다. 기름기는 날리지만 촉촉한 보습감을 유지하는 것이 기술이며, 그 와중에 모발은 모발대로 탱탱하게 살려야 한다. 탈모 샴푸는 고난이도 곡예를 닮았다.
놀라움은 드라이를 하는 순간 일어났다. 이게 뭐지? 모발이 탄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한 올 한 올의 촉감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니 샴푸 한 번에 모발이 굵어질 수 있나. 그래비티는 폴리페놀로 머리카락을 코팅한다던데 자세한 원리는 몰라도 머리카락이 강해진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며칠을 더 지켜보았다. 그래비티 사용 후 사흘이 지났을 무렵 아내가 말했다.
"자기야, 십 년 전에 큰 애 태어났을 때 찍은 사진에 나오는 머리랑 닮았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내가 알아보았다. 그래비티, GRABITY! 정말로 놀라운 물건이었다.
탈모 갤러리에서 세 통씩 사서 쟁여두는 이유가 있었다. 카이스트 창업 기업 '폴리페놀 팩토리'는 갈퀴로 돈을 끌어모을 것이다.
그래비티 엑스트라 스트롱 샴푸는 475ml에 38000원이나 하는 고가의 제품이다. 그렇지만 가격 장벽은 탈모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내의 칭찬을 들은 나도 충동적으로 두 통이나 사버렸다. 대머리 치료제가 발명된다면 노벨상 수상은 물론, 치료제를 독점 판매하는 기업에게 돈벼락이 쏟아지지 않을까.
머리카락이 숭숭 빠지도록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열심히 번 돈을 빠지는 머리를 지키기 위해 쓴다. 탈모 샴푸도 중요하겠지만, 잠을 7시간 이상 푹 자는 것도 두피 건강을 지키는데 필수적이다.
잠 줄여 일하지 말고, 한 시간 더 자고 모발 성장 호르몬을 만듭시다. 응원합니다, 탈모 동지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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