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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민 NIRVANA Mar 04. 2018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

미투에서 미투게더로 

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
공식적으로.  

표현이 좀 거창하지만 내 생각을 제대로 전할 수 있는 다른 수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비록 폭력의 형태는 달라도 나 역시 어린 시절에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 농담처럼 술자리에서 몇 번 이야기를 해서 지인들은 이제 꽤 아는 사실이지만, 장가를 여러 번이나 간 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나는 삼촌, 고모가 수십 명에 이른다. 개중에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들도 있다. 호적상으로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혼인한 할머니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셨다. 그리고 청송을 중심으로 경북 내륙 지방에선 꽤 명망 높은 만신이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내가 살면서 만나본 이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선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이혼하자마자 총각 행세를 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새장가를 가려면 걸림돌이 된다고 여겼는지 우리 형제를 이산가족으로 만들었다. 특히 내 동생들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댁에서 자라야했는데 그나마 구김살 없이 큰 것은 할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한 분이 자식 복은 지지리도 없었다. 전 남편과 낳은 자녀가 2남 1녀로 모두 셋인데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교도소를 경험했다. 고모는 사기죄로, 큰아들은 폭력 및 갈취로, 그리고 막내아들은.... 생략하자. 입에 담기도 싫으니.

큰아들과 막내아들 사이에는 어릴 적부터 먹이사슬이 존재했다. 폭력적인 형 밑에서 자란 탓도 있겠지만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막내아들은 이미 어릴 적부터 싹수를 보였다고 한다. 제비 둥지에 올라가 새끼 제비들을 끄집어내려 쇠꼬챙이로 항문을 꿰어 산 채로 태워 죽인 일화는 정말 유명하다.
어쨌거나 큰아들은 교도소로 갔고, 둘째 아들은 할아버지 댁에서 지냈다. 어릴 때 신장염을 앓은 이력이 있는 나는 12. 3살 무렵에 다시 안 좋은 징후를 보였는데 그 핑계로 아버지는 1년만 요양을 하라며 나마저도 할아버지 댁으로 보냈다. 내게 그 1년은 평생 잊지 못하는 지옥 같은 세월이 되었다.

나는 그 1년 동안 세 살 위인 그 피 한 방울 안 섞인 삼촌이란 인간한테 매일 맞아야 했다. 이유는 다양해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저항? 물론 할 수도 있었다. 몇 번인가 시도도 했고 그때마다 스스로 내 의지를 꺾은 이유는 끝까지 대항하면 그 폭력이 내 동생들에게 향할 거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몇 번이나 사경을 해맨 적도 있고, 심지어 심심풀이로 과도에 찔린 적도 있다. 흔히 말하는 담배빵도 당해서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내 팔뚝과 다리에는 당시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그러면 왜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몇 번인가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협박을 당했고 또 믿어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렇다. 폭력 행위의 피해자가 입을 여는 데까지 얼마나 고통이 따르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왜 그때 말하지 못했냐고? 하지만 그렇게 내뱉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게 얼마나 두려움이 따르는지. 미투 운동에 자신의 과거를 토로하는 글을 보면 여전히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맞다. 세월은 약이 되지 못한다. 치매라도 걸려서 망각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에는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원래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오래 가는 법이다. 누군가는 너무도 안일하게 기억을 지우라고 하지만 그건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다. 설령 잊었다고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떠오르는 게 기억이다. 정말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기억은 정말 난폭하다. 무방비로 있다가 한 대 세게 얻어맞으면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30년도 넘게 지났지만, 나 역시도 종종 꿈에서 당시의 기억과 맞닥뜨린다. 이제 어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꿈의 형태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꿈에서 나는 그 인간에게 폭력을 당하는 어린 나를 본다. 하지만 나는 무기력하게 보고만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한 십년 전인가, 아 그보다 더 된 거 같다. 자기 고향인 청송 교도소에 수감된 그 인간을 딱 한 번 면회 간 적이 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 어쩌면 이제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런데 그때 그 인간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다 잊었으니 너도 훌훌 털어라. 사내답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화를 낼 기력도 없더라. 분노는 우습게도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뒤늦게 터졌다. 희한하게도 분노는 눈물이라는 형태로 표출되더라. 정말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나왔다. 그 뒤로 그 인간을 찾아가지도, 또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다. 오래 전에 풍문을 듣기로 또 교도소에 갔다고 한다. 아마, 그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다가 떠날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남의 불행과 경험을 함부로 예단하지 마라. 당신들이 아는가? 빈말이라도 그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지 마라. 고통은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늘로 찔려보기 전까지는 그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여기에 연민이나 동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정말로 당신이 이 운동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그냥 말없이 지지하라. 그 어떤 평가도 하지 말고. 조용히, 그들을 응원하고 지지하라. 그게 최선이다.

그러므로 나는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
그 일환으로 29초 영화에 출품하기로 한 작품도 미투 운동을 소재로 삼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서. 그래서 미투게더라는 표현을 썼다. 이 운동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고 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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