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사십 대 후반, 암에 걸리기 전에는 좀 더 크고 좋은 집과 차 그리고 자녀 교육까지 욕심껏 바라보며 열심히 달렸다. 돈을 모으고 목표를 향해서 끝없이 뛰는 삶이었다면 지금은 속도를 멈추고 삶의 가치를 들여다보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 것이 암에 걸린 후 내가 얻은 가장 큰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돈과 성취가 목표였다면 이제는 건강과 나 자신 그리고 타인과 따뜻한 교류 등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서 돈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별로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쇼핑과 식탐으로 풀었는데 지금은 스트레스가 없는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딸들에게는 원래도 방임주의였지만 지금은 더욱 내려놔서 너무 한 거 아니냐는 항의를 받는다. 봄이면 텃밭의 모종이 더 소중한 나에게 자신들은 모종보다 덜하다는 불평을 한다. 자식들의 인생에 크게 관여하지 않고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 하는 게 아만자의 숙제이다.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서본 경험은 그래서 소중했다.
2.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암카페 <아름다운 동행>에 올라오는 사연 중에는 암에 걸리자 며느리 노릇에서 제외되어 편하다는 글이 가끔 눈에 띈다. 제사 참석이나 안부 전화 등 며느리 노릇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신세가 되어 보니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명절에도 시집 부엌에서 못 벗어나다가 갑자기 한가한 몸이 되어 어리둥절할 때도 있었다. 큰 수술을 하고 그 힘들다는 항암을 하며 정기 검진을 해야 하니 아무리 시집 식구들이지만 아만자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나는 위암이라 체중이 심하게 빠져버려 사람 꼴이 아니라서 더구나 아만자 특혜를 톡톡히 누렸다.
직장을 그만두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가 있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하니 일상생활도 겨우 지탱하는데 온종일 나가서 일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병 휴직을 하고도 도저히 복직할 상태가 아니라서 퇴직하고 말았지만 내가 암수술하고 입원해 있을 때 동료들이 와서 엄청 부러워한 일도 있었다. 쉬게 되어 부럽다는 동료에게 "까딱하면 죽는 수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암에 걸려 가장 좋았던 것도 직장을 안 나가도 된다는 점이었다. 아침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은 그 후로도 3년 정도 지속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바라는 게 없어지니까 새털처럼 가벼워진 삶의 무게가 내 기분을 날게 해 주었다. 직장 다니며 살림을 하고 아이들 양육과 시집 식구 등 나를 짓누르던 많은 의무들이 암과 함께 몽땅 사라진 기분은 생각보다 홀가분하다.
3. 인간관계가 정리된다.
크게 아파보면 인간관계가 둘로 나뉘게 된다. 알곡과 쭉정이로 확실하게 구분되는데, 신기할 정도로 명확해진다. 마음이 진실하고 따뜻한 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지니, 몹시 허약해진 몸과 마음으로는 더 이상 내 사람이 아닌 지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친구들과 단절을 했다. 만나면 자기 말만 하고 소통이 되지 않는 친구와는 그 세월이 몇십 년이든 상관없이 단호하게 연락처를 삭제하고 만나지 않고 있는데 더 이상 궁금하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다. 대신 마음이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만 만난다. 만나면 즐겁고 유쾌하며 헤어진 다음에도 마음속에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이 소중하다.
4. 평생 숙제인 다이어트가 유지된다.
위암 이전에는 과체중으로 살았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과거의 내가 그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수술 후 항암을 시작하자 60킬로 가까이 나가던 체중이 42킬로로 내려갔다. 커다란 얼굴에 앙상한 몸매는 마치 숟가락을 세워둔 것처럼 볼품없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때는 양손으로 허리를 감으면 양쪽 손가락이 맞닿을 수 있었다. 먹는 항암을 일 년간 했는데 부작용이 없는 편이라는 약이었지만 오심과 안구 건조와 피부 변색과 탈모와 설사 등 많은 부작용에 시달렸다.
위전절제라 많이 먹을 수 없으니 자연적으로 날씬한 몸매가 유지되고 있다. 66 사이즈로도 꽉 끼던 옷이 이젠 44가 되어 주변에서 작아진 옷을 모두 내게 준다. 몇 년째 옷을 사지 않아도 되는 이유이다. 지금은 당뇨식을 하니 더욱 날씬해져서 이젠 "뚱뚱한 게 뭐예요?"라는 몸이 되었다.
5. 고난이 깊을수록 신앙이 자란다.
고난은 축복이라는 선물을 둘러싼 보자기라더니 암이라는 커다란 고난이 닥치자 희미하던 신앙심이 횃불처럼 불타올랐다. 고난 속에 성령이 찾아와서 거짓말 없이 정말 웃고 다니는 투병 기간을 보냈다. 가슴 벅차고 한량없이 기쁘고 감사하던 심정은 글로 표현할 수 없지만 지켜본 가족들은 항암 하던 시절의 유쾌하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암카페의 모임에 갔더니 한 회원이 나를 보고는 "얼굴에서 은혜가 줄줄 흐른다."는 표현을 했다. 뽕 중에서도 가장 효과가 뛰어난 뽕이 성령 뽕인 줄 나는 확실하게 체험했다.
6. 시골 생활이 십 년 당겨졌다.
암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정년까지 다녔을 안정된 직장인데 나는 이미 시골에 가서 살고 싶은 로망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신은 나에게 암에 걸리는 방법으로 소원을 십 년 당겨주셨다. 암 진단금과 퇴직금을 끌어모아 우여곡절 끝에 시골집을 짓고 꿈에도 그리던 시골 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난주엔 냉이를 캐와서 냉잇국을 끓여 먹었다. 마트에서 봄나물을 사겠다는 딸에게 그런 건 캐서 먹는 거라고 알려줬다. 냉이와 달래, 쑥, 머위, 화살나무순, 취나물 등이 차례대로 올라올 것이다. 봄꽃들도 싹을 올리고 있어서 다음 달이면 꽃구경을 할 수 있다.
7. 일상의 소중함에 눈 뜨게 된다.
밤에 누우면 아프지 않은 몸과 근심 없는 마음에 감사하면서 잠들게 된다. 처음에 위를 다 잘라낸다고 했을 때 먹는 건 어디로 소화되는지, 배고픔은 느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암에 걸리고 큰 고생을 하고 나면 숨 쉬고 걷고 식사하고 배출하는 모든 일상이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사소한 일상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받아들여지는 건 아만자들의 공통된 소감이다.
8. 암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암카페 <아름다운 동행>에서 평생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같은 암환자라는 이유 하나로도 만나자마자 십 년 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암이라는 병의 막강한 힘이다.
의사에게 암을 진단받는 순간, 죽음을 선고받은 듯한 경험은 가족이나 친한 친구와도 나눌 수 없고 같은 아만자끼리만 통하는 아픔과 고통이기에 눈빛 하나로도 동정과 위로가 되는 것이 암 친구이다.
다른 사람이 하는 백 마디 말보다 같은 암환자가 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눈물 나도록 고맙고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이다.
아만자끼리는 농담도 곧잘 하면서 암이라는 무거운 그림자를 서로 나누게 된다. 시골집을짓기 전에 셋집을 얻어 살 때 유방암, 자궁내막암, 대장암, 난소암, 위암 이렇게 나까지 다섯 명의 회원들이 모여 밤에 화투를 치며 놀았다.
그중에지금은 별이 된 대장암 회원이 화투를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끌자 유방암 회원이"거 참, 항암 한 번더 받고 와도 되겠네!"라고 농담을던지는 바람에 모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9. 나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
미워했던 자신과 소홀히 대했던 인생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암이 주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다. 내가 싫어서, 미워서 견딜 수 없던 과거에서 이젠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다'라고 여기게 된다.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해서 암에 걸렸다면 이젠 누가 뭐라든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체력이 떨어지니 그전에 했던 많은 일들을 줄이고 내가 꼭 바라는 것에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웠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과거의 나는 내가 싫었는데 지금은 내가 좋다.
10. 운동과 식이의 습관을 바꾸게 된다.
흡연과 음주와 해로운 음식을 먹던 암환자들은 그동안 살던 방식을 완전히 바꾸라는 충고를 많이 받는다. 그래서 건강식을 하고 운동을 꾸준하게 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취하게 되는데 재발과 전이가 무엇보다 두렵기 때문이다. 암환자는 흔히 깨진 유리병을 반창고로 붙여놓은 상태라고 비유한다. 그만큼 건강이 크게 무너진 사람들이기에 일반 사람보다 훨씬 취약한 몸인 것이다. 건강한 식이와 운동으로 그동안 살아왔던 잘못된 태도를 싹 바꾸고 새롭게 습관을 들이게 된다.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가공 식품과 찬 음식, 날 음식, 기름지고 달고 짜고 매운 것들을 거르고 몸에 좋은 재료를 골라 집에서 정갈하게 해 먹는 건강식을 추구해야 한다. 운동도 필수라서 각자에게 맞는 수준의 운동을 골라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각종 생활습관병을 비롯하여 암을 완치하고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수많은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좀 더 보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