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져야 열리는 파랑의 세계

청출어람

by una

평생 맡아본 적 없는 냄새였다. 시큼하고 낯선데, 이상하게 건강한 냄새. 상처 하나 없이 탱글하던 잎이 부서지며 내는 냄새. 그 냄새가 파랑에서 온다는 걸 처음엔 몰랐다.



청출어람.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를 의미하는 이 사자성어를 직역하면 이런 뜻이다.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다." 그 말은 파랑을 키우는 땅, 쪽 밭에서 왔다.


쪽은 한여름에 수확한다. 분홍 꽃을 매단 꽃대가 올라오기 전, 풀이 가장 크고 튼튼하게 자라는 계절에 벤다. 여름 장마가 비를 뿌리고 간 다음날이면 신선하고 생기 넘치는 존재들이 밭에 가득했다.


농부들의 숙련된 낫질로 깔끔하게 베어진 쪽잎은 어디 하나 상하지 않고 건강한 자태를 뽐낸다. 반면 농사일이 익숙치 않은 도시인인 내가 어설프게 낫을 휘두르고 간 자리는 지저분하게 뜯겨진 이파리들이 널린다. 아무렴 어떤가. 쪽 잎이 얼마나 예쁘게 베어졌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는지 기대라도 하는 듯, 잘 자란 이파리는 반질한 얼굴로 어설픈 도시농부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제 싱그러운 쪽잎을 큰 통에 넣을 차례다. 어른이 3명도 거뜬히 들어갈 것 같은, 내 키만 한 600리터 통을 고래통이라고 부른다. 이름이 고래여서 그런지 거대한 고래 뱃속을 닮았다. 나 혼자 큰 고래통을 가득 채우려면 반나절이 꼬박 걸린다. 통 속의 쪽잎이 모두 잠길 만큼의 물까지 묵직하게 채우면 수확이 끝난다.


통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 홀로 놓인다. 쪽풀은 날씨에 따라 하루에서 사흘까지도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쪽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에 저항하지 않는다. 연약하게 뭉개지고 찢어지며, 자신의 가득했던 에너지를 물 밖으로 뱉어낸다. 아늑한 온실이 되어 싱싱함을 안전히 품어줄 것처럼 보였던 고래통은, 차오르는 수면과 서서히 치솟는 열기로부터 풀잎을 지켜주지 못한다. 통 밖은 고요하지만, 그 안은 쪽 풀들이 몸을 비트는 소리로 가득하다.


몇 밤이 지나 고래통을 다시 찾으면, 그 냄새를 맡게 된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시큼한 삭은 냄새. 부패의 냄새와는 다르다. 코를 찌르지만 어딘가 건강하고 생명이 느껴지는 냄새. 숨을 후 내쉬며 다가간다. 눅눅한 색으로 삭아버린 쪽잎 줄기를 살짝 걷어내면, 비현실적으로 파랗고 투명한 물이 고개를 내민다.



싱싱하고 푸르던,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던 잎을 물에 가라앉히고 부수는 일. 전성기 시절의 쪽에게 다소 잔인해 보이는 이 과정은 쪽 염료 니람을 만들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쪽의 푸른 색소는 잎사귀 단단한 세포 안에 숨어있다. 쪽 스스로도 파랑이 숨어있음을 알지 못할 정도로 깊은 어딘가에. 파랑이 되지 못한 쪽잎은, 나는 원래 초록이었노라 믿고 이파리로서의 한 해의 생을 살고 죽는다. 하지만 파랑을 기어이 꺼낸 쪽잎은 다르다. 초록의 껍질을 깨고 나온 파랑은 니람이라는 진한 색소가 되어 옷감으로, 종이로, 가죽으로, 천으로 물든다. 그렇게 물들여진 천은 1년을, 100년을, 1000년을 산다. 초록이 찢기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세계로 파랑은 나아간다.


처음으로 손에 낫을 쥐어본 어느 여름날. 작업용 장화를 신고 진흙 밭을 어색하게 걸으며 고래통에 다가갔다. 파란 물 위로 내 얼굴이 비쳤다. 통 안에 잠겨있는 내가 보였다. 어디에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반복되는 실패에 좌절했던 그 시절도, 애써 쌓은 것들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현실 앞에서 부서졌던 그날도 이런 냄새를 풍기고 있었을까.


고래통처럼 듬직한 무언가가 나를 늘 감싸주는 유년기를 보내온 나는, 늘 스스로 엄살이 심하다 생각했다. 큰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자괴감이 무력감 위에 조용히 쌓였다. 소리 없이 서서히. 이날 이후로 수년이 흐르고 여러 번의 농사를 함께 지었지만, 나는 여전히 숨 막히고 뜨거운 통 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고래통 안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는 아직 모른다. 여전히 뜨겁고, 여전히 냄새나고, 여전히 뭉개지는 중이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 안다. 이 냄새가 부패가 아니라는 것을.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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