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막걸리가 필요하다
쪽은 막걸리를 먹는다. 염색을 하기 위해서 염색가는 자신만의 '쪽 항아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재료가 물, 조개 가루, 쪽 염료 니람, 그리고 막걸리다.
쪽 염색가이자 농부인 엄마는 자신의 모든 공간마다 쪽 항아리를 배치했다. 공방이 있던 옥상에도, 건물 밖 조그만 앞마당에도, 사무실 안에도, 쪽 농장 작업실에도. 엄마가 이사를 갈 때마다 크고 작은 원형 통들이 같이 따라다녔다. 나는 내가 일했던 사무실 구석에 놓인, 중간 사이즈 정도 되던 쪽 항아리들과 가까이 지냈다.
쪽 항아리에 막걸리를 붓는 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 중 하나였다. 마트를 돌아다니며 제조일자가 가장 최근으로 찍혀있는 페트병을 찾는 일은 번거롭지만, 평일 대낮에 주류 코너를 원 없이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제법 신나던 시절이었다. 사무실에 막걸리를 가져다 놓으면 뚜껑을 열지 않아도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사방에 솔솔 풍겼다. 도저히 한 모금 안 할 수가 없다.
먼 옛날,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파랑을 얻기 위해 술의 힘을 빌려왔다. 천연 염색에 쓰이는 대부분의 자연 재료들은 끓이면 색이 우러나온다. 양파 껍질에서는 고운 노랑이, 소목이라는 나무에서는 핏빛 빨강이 나오는 것처럼. 여기 천을 담그면 보이는 색 그대로 천에 물이 들고, 매염이라는 과정을 거쳐 색을 고착하거나 채도를 변형할 수 있다. 그렇게 염색한다.
그런데 쪽은 좀 남다르다. 호락호락하게 자신이 가진 아름다운 색을 주지 않는다. 파랑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불용성인 쪽 입자는 물에 녹지 않는다. 컵에 물을 붓고 막대기로 빙빙 저으면 잠깐 동안은 파란 물이 된 것 같이 보이지만, 이내 파란 입자들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물이 파랗게 보인다고 천을 섣불리 담가도 큰일이다. 물기가 마르면서 접착력을 잃은 입자들은 천을 아주 빠르게 탈출해 사라진다. 운 좋게 파란 입자를 천에 남겨두기 성공했다고 치자. 반전이 또 있다. 천에 붙은 파란 입자는 공기를 만나고 햇빛을 만나면 증발한다. 파란 염색을 한 줄 알았는데 다음날 보면 하얀 천 그대로라니. 처음 당해보면 굉장히 허탈하다. 결합력이 참으로도 약한 친구다.
물에 녹지 않고, 결합하기도 싫어하니 다른 방법으로 염색에 써야 한다. 여기서 막걸리가 필요하다. 막걸리는 낯가림 심한 쪽이 친화력과 결합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든다. 어쩐지 쪽에 마음이 끌린다 했는데, 파랑과 아무 관련 없는 인간과 이런 공통점이 있을 줄이야.
분명하게는 막걸리 속 미생물을 쓰는 것인데, 그래서 효모가 살아있는 생막걸리가 필요하다. 효모가 있는 누룩을 사용하기도 한다. 김치, 치즈, 와인처럼 쪽 염색도 미생물이 일하며 만들어지는 발효 식품, 아니 ‘발효 색깔’인 것이다. 엄마와 그의 스승인 물장이가 수많은 막걸리 테스트를 해본 결과, 장수 생막걸리가 도시 마트에서 구하기도 가장 쉽고 발효도 잘 된다고 했다.
발효가 진행될수록 쪽 물은 파란색에서 초록으로, 노랑으로. 때론 붉은빛을 띠기도 하는 오묘한 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냄새도 나기 시작한다. 쪽 염료 니람의 쿰쿰한 바다 이끼 냄새에 막걸리가 더해져, 약간 고소한 젖은 술빵 냄새도 나는 듯하다. 다만 이 냄새는 처음 맡으면 굉장히 낯선 냄새임은 분명하다.
쪽 물이 색과 냄새와 촉감으로 '이제 된다'는 신호를 주면, 그제야 천을 담그는 것이 허락된다. 막걸리와 함께 기분이 좋아진 쪽은 떨리는 두 손이 보내준 천 조각을 온 힘을 다해 받아준다. 환원된 색소는 물에서 나와 공기와 만나며 산화한다. 이번에는 더 단단한 파랑이 되어 천에 남는다. 아주 오래오래.
쪽 수업 3회 차 정도에 접어들면 '집에 내 쪽 물 앉히기'를 숙제로 받는다. 내 손으로 드디어 쪽 염색을 할 수 있다는 설렘도 잠시. 바로 다음 날부터 수강생들의 걱정과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색이 안 변해요. 파란 막이 생기는데 이상해요. 너무 추운 가요? 더운가요? 효모가 죽은 걸까요? 계량이 틀렸나요? 성미가 급한 누군가는 막걸리를 부은 지 5분도 안 돼서 휴지 조각을 담가보고 염색이 안 된다며 단톡방에 질문을 올린다.
처음으로 항아리에 막걸리를 넣었던 날. 나 역시 파란 물이 빨리 초록으로, 노랑으로 변하길 바랐다. 자꾸 들여다보면 빨리 될 것 같아서 하루에도 서너 번 큰 뚜껑을 들어 올리고 물 위를 후후 불어봤다. 엄마가 말했다. 많이 본다고 빨리 안 돼. 그냥 기다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