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다쟁마미 Oct 27. 2019

아이가 멀어지는 게 아니라,당신이 밀어내고 있는거다

- 학교 학부모초청행사에 상습적으로 불참하는 엄마(부모)들에게 고함

중학생인 큰 아이의 학교에 학부모수업공개가 있었다. 5,6교시가 공개수업이었다. 평소보다 화장에 더욱 신경을 쓰고 나갔다. 화장을 한 티를 '안' 내기 위해서 각별히 신경을 썼다. 나의 용무가 있어 외출 할 때는 색조화장을 하는 편인데, 이날은 특별했다.

  이 날은, 우리딸의 ‘엄마’자격으로 외출하는 날이라 그러했다, 내 나름 아이의 입장을 배려한 처사였다. 평소에 엄마의 화장이 짙으면 꼭 한 소리 하고 지나가는 딸.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 방문이라 조심스러웠기 때문이다.


  교실 문 앞에 도착하니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의 엄마들이 왔다. 단 세 명이었다. 의아했다. 그리고 5교시가 끝난 뒤, 6교시를 참관하려고 엄마 한 명이 더 왔다. 그 중 한 엄마가 참석한 이유를 말해주었다.


  “애가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다른 엄마들도 안 온다면서. 실은, 저도 오지 않으려다 온 거에요.”


  속사정은 이랬다. 우리반 학부모들의 참석률이 심히 저조하다는 후문을 듣고는 아들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했댄다.(이 엄마는 반에서 학부모대표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던 아들의 행동은 정작 달랐다. 복도에 서 있는 엄마를 보자 친히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나와서는 한 번 씩 웃고 교실로 들어갔다.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그 아이는 수업시간 동안 엄마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머쓱해하긴 했지만 연신 웃음기 띈 얼굴이었다. 즐거워보였다.

  그 순간을 포착한 나는 아이와 엄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면서 뭔가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라고나 할까. 순간, 엄마라는 존재는 아이에게 기를 불어넣는 사람, 빛나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들이 너무 안 오셨네요. 우리반만 이런건가요?”

  다른 한 엄마도 의아해했다. 초등학교 수업공개와는 영 딴판이라고 하면서.


  대체 누가 변한 것일까? 아이인걸까, 학부모인걸까?


  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공개수업에 학부모참석률은 이보다는 훨씬 많았다. 자녀의 학년이나, 학교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아이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경우와 내가 초등교사로 근무했을 당시를 감안했을 때, 많게는 열 명 내외, 적게는 예닐곱 정도는 되었다. 그 때 참석했던 엄마들(가끔 극소수의 아빠들)은 자녀가 중학생이 된 지금,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아이를 학교에 보내보면 알게 된다. 연중 학교일정 중, 학부모가 참석할 수 있는 행사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다. 학부모상담, 공개수업, 운동회(체육대회) 그리고 교통지도를 위한 녹색어머니회 정도다.

  하지만, 자녀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의 관심사는 아이의 성적과 공부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진다. 그러한 학부모들의 성향은 오늘과 같은 공개수업 등의 행사 참석율로 증명이 된다.


  ‘알아서 잘 하는 것 같아서요…’, ‘아무 일 없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것 같았거든요.…’


  “학부모상담 다녀오셨어요?”라고 물으면, 참석하지 않은 엄마들에게서는 대부분 이런 공통된 답변이 돌아온다.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 하는 것 같아서 특별히 가야할 이유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생존, 생계를 위한 돈벌이를 쉴 수 없는 부모는 예외로 둔다). 가끔가다가 이런 대답도 더러 있다.


“애가 저더러 학교에 오지 말래서요. 그래서 안 갔어요...”


  학부모로서의 권리는 엄마(또는 아빠)스스로가 행사하는 것이다. 내 아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표현은, 학부모참석행사와 같이 아이와 관련된 일에서 부모가 작은 행동을 취함으로써 표현되고 확인될 수 있다. 초등학교 수업공개 때 엄마가 온 아이들의 얼굴빛은 유난히 밝았다. 왠지 자세는 목에 힘을 준듯 보였고, 평소보다 더 들뜬 모습들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이들의 나이별로 불리는 별명이 있다. ‘미운 세 살’, ‘죽이고 픈 일곱 살’, ‘중2병(사랑스럽던 내 아이를 '병'이라 지칭하다니...)’등이다. 그걸로도 모자라, "우리나라의 중2가 무서워서 누가 침략을 못하고 있다"는 부가설명도 덧붙인다.

  필시 이런 말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어른들일 것이다. 시쳇말로, 아이한테 '여본' 적이 있거나, 육아에 넌더리가 났던 경험이 있는 부모들일터다. 여기에 언급된 아이의 '특정 나이'자식을 키워본 부모가 자신의 마음에서 아이를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하는 바로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누가 변한 것일까? 아이인 걸까, 부모인 걸까?


  아이가 점차 성장하면서, 부모는 아이를 다루기가 어려워진다. 자기생각을 말하기 시작하고, 자기만의 논리를 펴기 시작하면서 부모들은 아이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몰라서 곤란을 겪는다. 되도록 아이와 부딪히는 일을 피하고 싶어하고, 어느 샌가 아이에게서 풀려나고 싶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본인도 모르게 서서히 아이를 마음에서 밀어낸다.


  ‘잘 크고 있겠거니…’, ‘아무 문제 없으니까…’하면서 학교의 이런저런 행사에 굳이 본인까지 갈(나설) 필요는 없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젠 좀 편해지고 싶다. 아이에게서 벗어나고 싶다’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부모라는 자리는, 자녀에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수습하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두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평소에 아이와 부모사이에 쌓아놓은 신뢰와 사랑의 기억들은 갈등이 생기더라도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에어백 같은 역할해준다.


  선진국의 교육제도를 부러워하는 엄마들이 정말 많다.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시켜준다며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 곳의 학부모들이 학교행사에 대해서 얼마나 적극적인지, 협조적인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는 학교와 학부모가 함께 키워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늘 떠올리는 부모가 되자. 내 아이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때’는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특별한)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해줘서 고맙다(비록, 학교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지 않을때 조차도 가주니 고마운거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할 기회다.

  "엄마(아빠) 너의 학교생활을 항상 응원하고 있다"는 마음표현을 학교행사 참석하는 것으로 대신해보자. 아이에게 사랑과, 응원의 눈도장을 찍어둘 절호의 기회니까 말이다.


  5교시 수업은 도덕. 어른인 엄마들이 듣기에도 45분은 너무 곤욕이었다. 재미도 없고, 지루했고, 게다가 계속 서 있어야해서 허리도 아팠다고 엄마들은 입을 모았다. 앉아있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상황이 많이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눈빛을 보니 상태가 짐작이 되었다.

  다행히 6교시 수업은 재미있었다. 선생님에게서 활력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이전수업과는 확연히 달랐다. 교과는 '수학'이었는데도 말이다. 신기하리만치 엄마들 역시 허리통증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물론, 연이어 90분 이상을 서 있으려니 마흔 언저리의 여자들에게 허리 아래로 기본적인 통증은 있었지만). 수업에 빠져들었고 그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런 시간을 '견디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다. 이런 경험을 학교에서 하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인, 아빠인 당신들을 만나는 것이다.  

  학부모인 당신의 진짜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 아이가 당신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아이로 부터 멀어지고 싶어 하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