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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May 09. 2022

chapter 2.  편지를 보내요

첫 번째 편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학교를 안 가는 딸과 회사를 안 가는 남편이랑 삼위일체처럼 지내던 지난 2년간의 시절이 끝나고 드디어 매일 아침 딸은 학교로 남편은 회사로 가게 되었어요.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면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막상 혼자 있어봐도 별로 달라진 게 없어요.     

7시 30분쯤 일어나서 등교 준비를 해요. 사실 제가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라 저는 따로 할 게 없어요. 저는 그저 딸애가 일어났는지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간단한 아침 거리를 찾는 것밖에 하지 않아요. 아침엔 밥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는 딸 덕에 요거트나 빵, 떡, 과일 같은 것을 제때에 떨어지지 않게 준비만 해두면 되지요. 딸이 아침을 먹는 동안 가벼운 말 상대가 되어 주고 오늘 스케줄을 서로 브리핑해요. 학원 앞으로 몇 시까지 데리러 와야 한다든지, 저녁엔 뭘 먹고 싶은지 같은 얘기들이요. 딸이 등교 준비를 하는 동안 학교에 가져갈 물을 챙기고, 양말이나 스타킹, 교복 같은 것들을 찾는 것들을 보며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기 일수예요. 워낙 태생이 잠이 많아 출퇴근이 싫어서 직장 생활 같은 것은 꿈도 안 꿔봤던 사람인지라 딸이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를 다닌 지 십 년이 넘었는데도 아침 기상은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어요.

 

딸이 등교를 하면 8시 30분부터 2시까지 자유 시간이에요. 대략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2시부터 8시 30분까지 일을 해요. 이 시간 외에 수업 준비나 상담, 행정 업무 등을 하는 시간은 별도로 두고,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시간에는 그야말로  딴 짓을 할 틈이 없어서 물 한 모금 편히 먹을 시간도 없어요. 때문에 볼 일이 있다면 오전 중에 모두 마쳐야 일에 방해를 받지 않아요. 오전에 주어진 6시간 남짓의 시간이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닌데, 이상하게 오전 시간은 늘 모자라요.     

네, 맞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제 일과가 아이를 학교 보내고  8시 30분부터 바로 시작되는 건 아니에요. 식구들을 다 내보내고 나서 저는 남아 있는 잠이 사라질까 걱정하며 다시 침대로 파고들어요. 알람은 오전 9시에 맞춰 두지만 9시에 바로 일어나는 날은 손에 꼽아요. 빠르면 9시 30분쯤 보통은 10시쯤. 주중반이 되면 십분 간격으로 여남은 번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일어나요. 목요일쯤 되면 열 한시까지는 자야 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

열 시쯤 일어나면 오후 두 시까지 이제 세네 시간밖에 안 남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급해져요. 어림짐작해보면 세네 시간이면 아침을 먹고, 8 천보쯤 산책을 하고, 책도 좀 읽고, EBS 잉글리시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지만 할 일이 제게 할 일이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간단히 제가 먹을 아침을 챙기며, 학교와 학원 사이에 아이가 먹을 간식과 학원 끝나고 돌아와 먹을 저녁을 같이 준비해요. 저는 두 시부터 일만 해야 해서 집안일은 무조건 오전에 다 준비해 놔야 해요. 남편은 바쁘기도 하고, 이제 주중에 저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을 반쯤 포기한 것 같아요. 하지만  달랑 세 명 밖에 없는 식구들의 스케줄이 다 달라 식사시간이 제각각이라 주방 일이 말끔히 끝나질 않아요. 간식과 저녁거리를 대충 정리하고, 거실과 베란다의 화분 상태를 체크해요. 좋아서 돌보는 식물들이지만 숫자가 늘면서 자칫하다가 놓치는 녀석들이 많아요. 잎이 축 늘어진 녀석이 없는지 매일매일 확인해봐야 해요. 화분 사이를 돌아다니며 손가락을 푹 찔러 흙이 말랐나 안 말랐나 확인하고, 누런 잎들을 떼주는 시간을 좋아해요. 거실과 싱크대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며 물을 주고, 잠깐 소파에 앉아 아침 해가 들어 반짝이는 초록 이파리들을 보고 있는 시간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아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도 있으니까요.

어젯밤부터 뭔가 심상치 않는 소리로 돌아가는 건조기 회사 AS센터에 전화를 해야 하고, 오늘 아이 학원 스케줄을 확인하고 연락하기로 한 학부모와의 통화도 있어요. 택배 반품도 문 앞에 내놔야 하고, 엄마가 부탁한 반찬 거리와 생필품을 오전 중에 주문해놔야 해요, 아이 학원 결제일에 맞춰 교육비를 이체해야 해요.

급한 일부터 처리를 하고 나면 수업 시간까지는 채 두 시간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직 펴보지도 않은 오늘 신문을 펴고, 잠시 내가 아닌 세상 이야기를 읽어요. 신문을 읽는 길지 않은 시간에도 세탁기 종료 알림음과 아직 통화 연결이 안 된 건조기 AS센터와의 통화 때문에 자꾸 정신이 흐트러져요. 집안 곳곳에 굴러다니는 먼지들을 보고, 오늘 아침 청소기 미는 것을 감빡했다는 생각이 나요. 하루에 삼십 분씩 듣기로 한 EBS 영어회화를 크게 틀어 놓고, 청소기를 밀고, 중얼중얼 원어민의 발음을 따라 해봐요. 창틀이나 싱크대 모서리에 낀 때는 모른 척해요. 남편은 왜 2년이 넘도록 새 마스크를 꺼내고 포장지를 쓰레기 통에 넣지 않는 걸까요? 간신히 청소기를 밀며, 처음 듣는 단어를 빈 종이에 받아 적기도 해요.     

이제, 정말 오전 일과를 다 소화한 건가? 청소기를 집어넣고, 거실 책상에 앉아 봐요. 지난 주말 욕심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은 모두 앞 장만 읽은 채로 놓여 있어요. 이번 주 내로 읽고 수업할 책들도 쌓여 있어요. 집중해서 읽고, 몰입하고 싶은데 오전 시간은 너무 분주해요. 몇 분만 있으면 딩동 하고 아이들이 몰려올 거라 생각하니 제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야 생각납니다. 부지런히 씻고, 화장도 하고,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소파 끝에 비스듬히 걸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 봐요. 이런 자투리 시간엔 인스타그램만 한 게 없어요. 뭘 읽기도, 보기도 애매한 시간엔 그저 인스타그램에 올려져 있이미지들을 보는 게 적당해요.

갖고 싶고, 입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일들이 인스타 안엔 가득해요. 직접 갖고, 입고, 보고, 하기엔 에너지가 너무 많이 필요해요. 수업 전엔 최소한의 에너지만 써야 오후에 수업하며 방전되지 않아요. 최소한의 에너지를 분배해서 사용하기 위해선 손가락만 움직이면 어디든 가닿는 SNS 세상이 제일 쉬워요. 취향을 고려한 콘텐츠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요,  

그러다 딩동~ 벨이 울리면 일이 시작돼요. 열 살부터 열네 살까지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시간이에요. 아이들은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 열이면 열, 모두가 달라서 각각 맞춤형 서비스를 하고 나면 어느덧 밤이 됩니다. 저녁 먹을 시간이 없는 날은 수업 중간에 초콜릿이랑 목캔디로 버티는 날도 있어요. 미리 든든히 챙겨 먹으면 될 일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먹는 거 좋아하기로 뒤처지지 않는 저도 이상하게 일하기 전엔 소화가 잘 안 돼요. 수업 전엔 최소한으로 먹고, 일이 끝나고 나서야 마음 편하게 먹어요. 8시 30분이 넘어서야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의 식사를 할 수 있어요.

밤 9시가 넘어서야 학원에 간 아이와 회사에 간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마무리됩니다. 

일 한 시간을 빼곤 전부 혼자 있는 시간이었는데, 오늘도 혼자 있어 충만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아요.

오전 내내 잔잔하고 하찮은 그러나,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을 하느라 바빴고, 오후 내내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에너지가 다 소진되어 버려요. 이제야 책을 좀 읽으려고 펴지만 채 몇 장 읽기도 전에 내일 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떠오릅니다. 열한 시가 되기 전에 내일 새벽 배송으로 받아야 할 물건들도 주문해 놔야 하죠. 메모장에 별표를 하고, 내일 스케줄에 맞춰 알람도 맞춰놨어요. 이젠 알람을 맞춰 두지 않으면 분명 어제 기억한 일들도 까먹기가 일수입니다.

밤이 되니 글자가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도 뭐라도 즐거운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어 넷플리스를 켜보기도 해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중에 어느 걸 골라야 망치지 않을까 고민하다 이것저것 예고편만 보다 오늘에 딱 맞는 한 편을 찾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아요. 그럴 때엔 다시 인스타그램을 켜봐요. 예쁘고, 좋은 것, 갖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것들을 욕망해요. 가끔 나와 너무 동떨어진 세상을 보고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아 질 때는 인스타그램을 며칠씩 삭제해두기도 해요.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음악을 켜고, 내일은 오전에 좀 걷고 오기로 생각해요. 창밖으로 여린 연둣빛 이파리들이 점점 진해지는 5월이에요. 창밖에서만 보기엔 아까운 계절이라 내일은 오전 잠을 좀 줄이기로 해요. 그러려면 오늘 일찍 잠이 들어야 할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의 하루를 길게 얘기하는 이유는, 오늘 누구에게도 저의 안부를 얘기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누가 묻지도 않기 전에 다짜고짜 제 안부를 얘기할 염치가 없어서 저는 혼잣말이 느나 봐요. 오늘은 하룻치 혼잣말을 당신에게 했네요. 내일은 좀 더 들을만한 얘기를 가져올게요.    

2022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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