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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푸레나무 식탁 Jul 26. 2022

chapter 02. 편지를 보내요

열 번째 편지 - 위대한 유산 

중2 딸이 이번 방학엔 책을 좀 읽어 보겠다고 했어요. 

방학 숙제나 계획과 상관없이 알아서 책을 읽던 딸이(할 게 그거밖에 없던 시절) 자연스럽게 책과 멀리 지낸 지 어언 3-4년째, 돌아오는 방학마다 늘 책을 읽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실천하지 못했어요. 

지켜보는 엄마 맘은 늘 애가 탔지만, 사춘기 딸에게 이러니 저러니 말해봐야 사이만 멀어질 게 뻔해서 그저 묵묵히(엄마 맘에만)  지켜보는 게 다였어요. 방학 시작과 함께 서점에 가서 책 골라보기, 도서관에서 부담 없이 골라보기, 필독서, 추천 도서, 엄마 취향 도서 등등 아무리 가져다 쌓아둬도 영 먹히지 않았어요. 그 무거운 책을 혼자이고 지고 다니는 것도 참 힘 빠지는 일이라 올해는 괜히 읽지도 않는 책을 사지도 않고, 빌려다 두지도 않으리라 다짐했죠.      


습관처럼 방학 시작과 함께 무엇을 읽을까 하는 딸의 말에 급한 대로 오래된 제 책장을 살펴봤어요. 이사하면서 대대적인 책 정리를 하면서 어지간한 책은 버리고, 팔고, 나누면서도 남겨둔 그야말로 살아남은 책들이죠. 멋진 서가를 갖는 게 로망이기도 하지만 무조건 쌓아두기만 하고 살 수도 없어서 꼭 소장하고 싶은 책들만 남겨놓고 도서관과 e-book을 이용하기로 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책들은 이건 우리 딸이 나중에라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책 읽을 시간도 없고, 영 내키지 않아 하지만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이것만은 꼭 읽어주렴 하는’ 것들로 말이죠.      


엄마 나 뭐 읽을까 하는 질문에 너무 고리타분하지도 않고, 술술 잘 읽히면서도, 읽으면서 참 잘 읽었다 싶은 책들이 뭐가 있을까 하고 한참 책장을 훑어봤어요. 이 책은 이래서, 저 책은 저래서, 요건 요래서 읽었으면 좋겠다 싶은 책들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책들을 몇 개 담고, 너무 옛날 얘기라 흥미 없어할까 싶어 요즘 젊은 작가들의 새 책도 담아봤어요. 방학 동안 진로 연관 책을 읽으면 물론 좋겠지만 아직 진로가 확실치 않은 사춘기 소녀에겐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소설이 제격이겠죠? 급한 대로 책장에 있는 책들로 박완서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옛날의 사금파리>,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 그 남자네 집>,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오가와 요코 <박사가 사랑한 수식>, 김혜진  <밝은 밤>, 김영하 <작별 인사>, 유진 옐친 <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교실>을 뽑아봤어요. 엄마 취향엔 모두 너~무 재미있는 책들이었지만 딸애 취향은 늘 일치하지 않기에 과연 어떤 책을 먼저 선택할지 궁금했어요. 웬걸요? 딸애는 아주 고전적으로 박완서 작가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먼저 선택했어요. 국어 시간에 지문에서 본 책이라 골라봤다는데요, 박완서 작가님이라면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이지요. 더운 여름에 이야기 속으로 술술 빨려 들어가기에 이보다 좋은 게 또 있을까 싶을 만한 이야기니까요. 


하지만 방학 특강과 숙제 사이 책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중국에 동우라는 사람은 책을 읽는데 세 가지 여유 시간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다죠. 밤, 겨울, 흐리거나 비 오는 날이면 책을 읽을 수 있다구요. 밤은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고, 겨울은 1년의 나머지 시간이며, 흐린 날은 맑게 갠 날의 나머지 시간이어서 이 세 가지 여유만 있으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는데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숙제하다 보면 밤이 되고, 밤이 되면 졸리고, 모처럼 여유가 생기면 우영우를 보고 싶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서 모든 날에 책 보다 즐거운 일들이 더 많아요. 책을 손에 들기가 참 어려운 시대이지요. 하지만 아이는 무슨 결심을 했는지 자기 전에 삼십 분이라도 책을 보려고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영 내키지 않았는지 엄마가 읽어주면 좋겠다기에 어릴 때 기분도 내볼 겸 <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첫 부분을 읽었어요. 

  

야성의 시기 
늘 코를 흘리고 다녔다. 콧물이 아니라 누렇고 차진 코여서 훌쩍거려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만 아니라 그때 아이들은 다들 그랬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싸잡아서 코흘리개라고 부른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여북해야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내 아이들에 대해 제일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책장에 꽂아 두고 그동안 적잖이 읽어 본 책이지만 소리 내어 읽어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세월의 더께를 입어 이미 누렇게 변한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굽이굽이 굽어지는 산자락을 따라, 실개천이 흐르는 시골 마을에, 저고리에 갈래 머리 땋은 꼬맹이가 누렇게 코를 훌쩍이며 다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구한말에, 일제 강점기에, 6.25 전쟁에 시대가 바뀔수록 ‘나’와 가족들의 일상은 어떻게 변하는지, 한 번뿐인 일생을 역사의 굴곡에 부딪히고 부딪힐 수밖에 없는 삶을 짐작해봅니다.      


어느덧 딸애 눈이 초롱초롱해졌습니다. 명작은 까막눈도 알아볼 수 있는 게 맞았습니다. 책이랑 담을 쌓기로 작정한 줄 알았던 딸도 이야기 속에 홀딱 빠졌습니다. 

“그럼 이게 백 년은 된 이야긴데, 이렇게 생생하다고? 진짜 옛날 얘긴데 너무 실감 나게 눈앞에 그려져” 하는 딸의 말에 괜히 흐뭇해집니다.      


한참 읽다가 딸애가 책날개를 펼쳐 봅니다.

4500원? 엄마 이 책 엄청 싸다? 

엄마가 고2 때 산 책이니까, 벌써 20년쯤 됐겠다. 

20년은 무슨 30년이 다 돼 가네! 92년 초판 인쇄, 94년 21쇄. 세상에! 30년을 안 버린 거야?    

  

친정집에서 신혼집으로, 그 후에도 몇 번의 이사를 거치는 30년이 다 되도록 늘 책장에 꽂혀 있던 책. 대대손손 물려 읽는 책의 존재감이란 바로 이런 건가 봅니다. 먼지 쌓인 책장에서 잊고 있던 보물들을 다시 꺼내 봅니다. 이쯤 되면 위대한 유산이라고 해도 되겠죠? 


                                                                                                             

( 사진 - 픽사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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