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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Nov 08. 2018

길고양이 보호자의 변(辯)

싸우지 말고 함께 고민해요

    계속되는 길고양이들의 잔혹사가 신문과 뉴스에 연이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보잘것 없는 글쟁이라도 굳이 애써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글에서 잘 쓰지도 않는 '경어체'까지 쓰며 이 글을 보시게 될 여러분들께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고양이에게 정을 주진 않을 지언정, 괴롭히거나 학대하진 마십시오. 이는 단순히 인간으로서 윤리나 도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께선 저를 비롯한 동물애호가들에게 비난을 쏟아부을 때가 있습니다. 펫충이니 캣맘충이니 하는 등에 여러가지 신조어들을 만들어 냅니다. 동물을 키우는 이들이 행하는 중성화와 같은 여러가지 행태의 모순점을 꼬집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동물을 사랑한다면서 함부로 거세를 시키고, 합리화한다는 그 주장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또다른 동물학대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동물보호주의자들이 하는 정신상태를 두고 '동정심 과잉상태'라는 지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잘 하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동물에게만 집착해 보호주의를 펼치는 거, 참 우스운 일입니다. 압니다. 저도 반성합니다. 저도 제 아내에게 온갖 못된 짓을 하면서도 길고양이 밥챙겨주러 나갑니다. 어머니의 마음에 비수를 꽂아놓고 방충망에 붙어 있는 꿀벌들에게 꿀 한술 떠다 먹이고 보냅니다. 얼마나 모순됩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모순되다고 해서, 우리가 굳이 계속해서 '창'만 들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내나 남편에게 개판치는 한 사람이 남의 아내나 남편에게까지 개판칠 수는 없습니다. 부모에게 막나가는 자식이 군대 중대장에게 혹은 직장상사에게 대들기란 어렵습니다. 기본적으로 다들 이런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권위와 권력, 계층에 따라 그 모순들이 더 잘 들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동물보호주의자들 또한 이런 모순된 점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이러니를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한다면,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비난의 대상이 되는 카테고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동물보호에 대한 비난의 카테고리는 엄연히 동물보호 그 자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물을 보호했을 때 발생되는 인류에게 끼칠 해악, 부작용 등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예컨대, 최저임금을 올릴 것인지 말것인지에 관해서 토론을 하듯, 우리는 그 반작용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통해 그것이 증폭된다면 그 비난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동물보호의 비난은 주체가 '동물보호'라는 카테고리라기 보다, 동물을 보호하는 사람이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비난의 대상의 끝엔 항상 이 대사로 연결짓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동물을 보호하면 인간에게 해로운 것이 있을까요? 길거리에 고양이들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인간들이 불편한 건 발정기때 잠을 자기 힘든 것과 쓰레기 봉투들을 뜯어 마을 미관을 해치는 정도 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동물을 보호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고양이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오게끔 만든 인간들을 비난해야 합니다. 화살의 방향은 동물보호가들에게 있는 것에 겨눌 것이 아니라, 동물의 생태에 대해 무지한 인간들을 겨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반도에 모든 고양잇과 동물들을 멸살시킬 것이 아니라면, 길거리에 고양이 한두마리 돌아다닌다고 해서 잡아 족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때 일본이 민족의 자랑이었던 한반도 호랑이를 몰살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에 속이 뒤집어 진 분들이 많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없어 걔네가 아직 산중에 돌아다닌 다고 생각한다면, 호랑이 때문에 불편해서 못살겠다고 하시진 않을 겁니다. 호랑이를 잡아 죽이자, 몰살 시키자가 아니라 호랑이 개체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방도를 찾았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죽이는 건 그저 백정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 없는 동물을 향한 인간의 분풀이일 뿐입니다. 아마 그게 고양이나 유기견이 아니라 백두산 호랑이었다면 맨몸으로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사람은 없겠지요. 


    동물보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건 단순합니다. 첫번째는 쓸데없는 고통을 통해 죽이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보호주자들의 목적은 길고양이를 보호하고 개체수를 늘려 한반도를 고양이 왕국으로 만들겠다, 뭐 이런게 아닙니다. "고통을 주어 죽이지 말자, 그리고 살아있을 때만큼이라도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이런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런 사회적 문제들이 있으니 정부나 지자체가 나서서 고양이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는 여러가지 방안을 찾자는 것입니다. 길고양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캣맘들과 길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또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입니다. 자 그럼 이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는 유기견, 유기묘 문제들에 있어서, 과연 죽이는 것만이 해법이냐 이런 문제에 당도합니다. 


    무언가를 파괴하고 없애버리는 것이 가장 손쉽고 빠른 해결책이긴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닌데, 우리 자손들에게 '우리가 사는게 불편해서 고양이들 씨를 말려버렸어' 라고 자신있게 말하실 수 있겠습니까. 콜럼버스식 해법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만, 그건 일종의 반칙입니다. 콜럼버스 때문에 우리는 달걀을 세워보라고 하면 다들 달걀부터 깨기 바쁩니다. 달걀을 세우라고 했지, 달걀을 깨라고 한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동물이 뛰어 놀기 좋으면 사람도 뛰어 놀기 좋습니다. 우리가 한강둔치를 왜 가고, 조용한 공원을 왜 갑니까. 한 마을이나 공동체에 동물들이 그들의 짧은 생을 마칠 수 있게 안전한 장치가 되어 있다면, 그 동네는 참 살기 좋은 동네입니다. 고양이의 사지가 찢기고, 머리가 잘리고, 독극물을 타 중독사 시키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 아이들을 키우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습니다. 


    동물보호는 공동체가 최약층을 대하는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잉의식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의 과잉의식으로 인해 인류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러한 과잉의식으로 신분제를 뛰어 넘었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성소수자와 여성들의 해방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아직 인간들에게 남은 숙제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지만, 이제는 우리가 동물들에 대한 관심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급하게 글을 마무리 짓자면, 쓸데없이 주절댔지만, 그냥 좀 함께 살자고요. 함께 살면 나쁜 점 보다 좋은 점으로 돌아오는 게 더욱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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