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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현 Nov 27. 2018

공짜밥의 비극

이 글은 칸투칸 '먹고 합시다' 에 기고하였던 글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엥겔지수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던 지표였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선진국, 후진국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폐기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엥겔지수는 여전히 서민식탁에서 소득 대비 지출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대부분의 가정은 엥겔지수를 낮추는 쪽으로 가정경제를 꾸린다.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은 조금이라도 덜 먹어 경제에 보탬이 되리라는 강력한 의지다. 

    나라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나도, 국가경제 또한 엥겔지수를 최대한 낮추는 쪽으로 복지시스템을 꾸려간다. 불경기일때는 생필품들의 가격을 안정화시키기도 하고, 라면이나 빵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음식들의 물가조절을 실시한다. 이와 같은 복지시스템의 발달은 인간의 천부인권과 보편적 인권을 확장시켜 주는 중요한 요소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복지의 기준을 어디에 맞출 것이냐의 논쟁은 나라마다 첨예하게 부딪히는 부분이다. 


    국가의 주도적인 복지로 개발된 제품은 아니지만, 세탁기의 발명은 여성의 인권을 급상시킨 아주 대표적인 가전제품이다. 세탁기 발명 이전의 여성은 하루 중 절반을 '빨래'에 투자했다. 빨래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교육을 받고 사회로 진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가사노동이 있었으니, 바로 식탁노동이다. 


    물론 요리의 영역에서도 여성을 사회로 밀어낸 제품들이 있었다. 냉장고로 인해 매일같이 장을 보거나 보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가스의 대중화로 여성들은 더 이상 오랜 시간 아궁이를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화력 좋고, 화구가 여러 개인 가스레인지는 여성들의 요리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켜주었다. 더 나아가 전자레인지의 발명은 여성들에게 더 이상 주방에서의 땀을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리행위의 특성상 '화식'과 '재료손질' 이라는 그 시간경비의 원천을 줄여주기는 힘들었다. 빨래는 조금만 배우면 누구나 다 요령껏 할 수 있지만, 요리는 그 스펙트럼이 워낙 방대하다보니 그야 말로 끝이 없는 무한의 세계와 같았다. 간단한 요리라 하더라도 개갠인의 손을 타기 마련이며, 숙달된 자가 아닌 이상 동일한 맛을 꾸준히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몇년전 열띤 논쟁을 벌였던 '전면무상급식'은 사실 단순히 학생들에게 공짜밥을 먹이느냐의 문제는 아니었다. 물론 유료급식 시스템의 확정된 가운데, '무료'와 '유료'의 논쟁이긴 하였지만, '급식' 이라는 시스템 자체는 엄마들에게 '요리'라는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게끔 하는 확실한 정책이었다. 게다가 '무상' 이라니. 이는 확실히 가정경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이렇듯 공짜밥인 무상급식은 개인이 해야할 일을 국가가 대신 해주면서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그 국민으로 하여금 다른 생산력에 개인의 에너지를 쓸 수 있게 함이 가장 기본적인 취지다. 하지만 이런 무상급식의 기준을 정하는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논쟁이 있다. 


    포드(Ford)가 자동차를 처음 생산했을 때는 에어백과 ABS 장치가 없었다. 하지만 도로환경이 발전할수록 이젠 에어백과 ABS는 모든 자동차의 기본사양이 되었다. 이처럼 사회가 발전할수록 기본적인 사회안전망 또한 더불어 발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회는 고작 수만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진 '자동차'가 아닌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합리성이 충돌하고, 서로의 이익이 날카롭게 부딪히기 때문이 이 안전망을 만드는 당위성의 기준은 달라지게 마련이다.


미리 밝히자면, 무상급식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청소년들의 무상급식찬성론자이지만, 무상급식의 끝 중의 끝, 아주 극단적인 역사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이 글을 쓴다. 


    머지 않은 과거, 불과 1세기도 지나지 않은 과거에 '무상급식'으로 인해 4000만명이 인구가 아사한 비극이 있다. 1세기와 무상급식이라는 단어에 눈치챈 분들도 있겠지만, 그렇다. 바로 공산주의가 대두되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 무렵 전국가적차원에서 무상급식이 이루어지던 나라는 소련이나 북한이 아닌 중국이었다. 중국은 1950년 후반 마오쩌둥에 의해 '대약진 운동'이 펼쳐진다. 대약진 운동은 마오쩌동과 공산당이 엄청난 열의를 보인 사회부흥운동이었다.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쯤 되려나. 


    대약진 운동하에 중국 공산당은 모든 인민들을 생산 단위로 묶어 취식을 함께 하도록 했다. 그리고 덤으로 각 마을마다 할당량을 부과하여 농산물 등을 생산하게 했으며, 모든 마을에 강철과 식량을 함께 생산토록 했다. 이때 인민의 원활한 통제를 위해 '인민공사'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인민공사를 통해 마오쩌둥은 국가 전체의 생산력을 끌어 올리기 위한 극단적인 한수를 두게 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민에게 '무상급식'을 주는 것이었다.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을 없애면 자연스럽게 생산력이 올라갈 것이라는 아주 단편적인 생각이었다. 공산당은 인민공사 대식당이라는 시설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당시 전 인민의 90%가량이 대식당에서 공짜밥을 먹었다.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철생산과 수요충족에 매진하다보니, 공산당인 집에 있는 철기들까지 수거해갔다. 그 중에는 웍(wok) 같은 철제냄비나 조리기구도 많았다. 나라에서 공짜밥을 주니 인민들은 별 필요 없는 조리기구들을 선뜻 국가에 내어주었다. 마치 금모으기 운동처럼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그들의 철식기를 기꺼이 나라에 받혔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 전후, 중국에는 최악의 기근과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식량샌상성이 최하로 떨어진 상태에서 공짜식당에서만 밥을 먹던 인민들은 그야말로 피죽도 못얻어먹을 지경이 되었다. 어렵사리 구한 식재료가 있더라도 조리기구가 남아있지 않아 조리해 먹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전 나라가 멘붕에 빠졌고, 결국 4000만명이 굶어 죽었다. 400만명이 아니라, 4000만명이다. 당시 인민공사의 슬로건은 '밥 걱정 하지말고, 노동에 최선을 다하라. 밥은 국가가 책임진다' 였다. 아주 단순하고 획기적인 말 같지만, 이 말은 20세기 중국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인민의 역사가 되었다.


    물론 당시 자연재해나 외부요인이 없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한가지 알아둘 것이 있다. 역사에는 비합리적일 것 같은 가외성(redundancy, 중첩성 혹은 중복성)이 인류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경우도 무척 많았다. 자동차의 스페어 타이어를 보라, 무게로 인해 차량의 성능을 저하시키고 연비를 떨어뜨리지만, 비상시에 운전자의 안전을 지켜주는 또다른 장치가 된다. 1845년 아일랜드에서 20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던 것도 감자의 가외성을 무시해서다. 


    공짜밥이 사회의 안전망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짜밥으로 인해 벌어질 비극에 대한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음식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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