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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트밀니트 Mar 18. 2024

겨울잠에서 깨어나

뜻밖의 계기







정말 오랜만에 찾은 브런치.








약간의 어색함과

내 집으로 돌아온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지금이다.










사실 연말부터 잔뜩 웅크리고 겨울잠을 잤다.



당시엔 혼란스러워서 이게 지금 어떤 건지,

무엇 때문에 힘든지 잘 몰랐고,

몰라서 더 힘들었다.



한바탕 소란이 잦아든 지금 되돌아보면


퇴사 후 막연한 자신감에 취한 시간이 걷히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자연인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동시에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전업주부로서의 나를 바라보며

자신감이 점점 떨어지던 시간.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패드와 키보드



뭐,

도를 닦거나

어떠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계기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우연히 집 근처 일자리 공고를 발견해서

일단 한번 넣어봤는데,

간호사라면 다 붙는 자리라 서류는 덜컥 붙고

필기시험을 일주일 앞두고 있었다.

(붙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공고뜰 때부터 필기를 준비해야 하는 공고였다.)



얼마 남지 않은 데다

진짜로 지금 당장 일할 생각까진 아니어서

공부는 전혀 하지 않은 상황이라

필기시험은 안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무조건 쳐보라고 밀어붙였다.

그냥 이렇게 안 치면

포기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붙고, 안 붙고 가 중요한 게 아니라

뭐라도 해보고 도전해 봤다는 데서

한 단계 자존감이 올라갈 거라고.

어쩌면 그것부터가

어떠한 시작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고.

굳었던 머리를 다시 가동시키고

공부를 시작했다는 데서 의미가 있는 거라고

자신의 용돈으로 서점에서 문제집까지 사줬다.



처음엔 저항이 셌다.

(내가)



이젠 이런 거 너무 하기 싫다고

어차피 붙지도 못할 시험 고생만 해서 뭐 하냐고

책값 아깝다고

정말 미친 듯이 하기 싫다고

ㅋㅋㅋ

수십 번 남편에게 말해봤지만

단호박을 먹은 남편은 아이를 봐주면서까지

도서관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계기는 정말 사소한 데서 시작됐다.




남편이 그런다고 해도

정말 하기 싫었으면 안 했을 텐데

남편의 말은 내가 생각해도 일리가 있었고

책값이 아까워서라도 ㅋㅋ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를 시작했다.

남편 말 따나

합격 여부를 떠나서 이 공부를 하고 나면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10년 만에 공부하는 입사 시험이었고

3년 전 대학원 졸업 후 첫 공부라

책 앞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씩 흩어졌던 감을 모아서

부족한 시간 속에서 나름대로 길을 찾아갔다.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했다.



남편의 말처럼

붙어야 한다는 마음은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데 까진 해보자는 생각을 하니

이내 마음이 편해졌다.


일주일 동안

아이 등원 시키고 9시 반부터 4시까지

Full로 책 앞에 앉아 있진 않더라도

최소 다른 게 내 맘속에 들어오진 못했다.

아이가 잠든 후에도

책상 앞에서 나름 집중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런 내 모습이 어색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내심 조금씩 기특해졌다.








한 달 전,

더 이상 아등바등이 하기 싫다는

찌질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번 공부를 하면서

잊었던 나의 아등바등 유전자가 눈을 떴고

붙지도 못할 시험에도 열심히인 나를 보면서


나의 열정이 여전히

심연 깊숙한 곳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출산 후 머리가 많이 굳었다고 생각하고

지레 겁먹었는데 굴리니 또 굴러가더라.

(이전보단 천천히지만)


시험은 쳤고 아직 결과는 안 나왔지만

(문제 풀이 상태를 생각하면 이미 떨어졌다 생각)


결과와 상관없이


3교대 병원 일하면서 학교 다닐 때,

직장 다니면서 대학원 다닐 때,

내가 가장 살아있음을 느낄 때의 나.



그때의 나와 마주했다.



나는 아등바등하기 싫었던 게 아니라

그때처럼 못할까 봐 겁이 났던 거다.






글이든, 블로그든, 브런치든, 취업 준비든

이번 시험 준비를 할 때처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집중해 본다면

뭐라도 되지 않을까?

설령 뭐가 되지 않더라도

생각지 못한 어떤 계기가 되진 않을까?


한 톨의 가능성.


그게 나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래, 이게 나란 사람이야.

그래, 이게 나답지.


길었던 나의 방황도

이런 확신을 단단하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남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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