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느림에 대해 말해볼까?
이안이의 소풍날,
7시 반 모임 시간에 8시가 다 되어 가는데 버스가 안 온다. 이른 아침 공기가 차가워 아이들은 담임과 교실로 올라갔다. 버스는 결국 1시간 반이 늦은 9시에 도착했다. 이탈리아 부모들의 반응이 어땠냐고?
참 해맑았다.
소풍 장소는 로마 근교, 거리가 있어 아침 7시 반까지 등교해야 한다. 이럴 땐 김밥을 안 싸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엄마는 새벽마다 김밥을 어떻게 쌌나몰라.) 보통은 동네 바에서 트라메찌니라는 이탈리아식 샌드위치를 사지만 이번엔 직접 만들었다. 참고로 이태리 샌드위치는 빵에 프로슈토 코토(훈제 햄) 치즈 넣으면 끝.
아직은 깜깜한 새벽 , 6시가 조금 넘었는데 깨우지도 않은 아들이 일어나 슥, 화장실로 들어간다. 뭐야? 너 설렌 거야? 아이는 씩, 웃는다.
전날 소나기가 내리더니 하루아침에 공기가 달라졌다. 춥다. 하늘은 눈부실 만큼 파랗다. 가을이 왔다. 오후면 따뜻해질 테니 소풍 가기 딱 좋은 날씨다. 학교 정문은 이탈리아 부모들의 수다로 왁자지껄 한다. 상기된 아이들. 이안이 반 친구들은 이도를 보자 격하게 반응한다.
이러니 애가 오빠 반에 가겠다고 매일 아침 난리를 치지. 짝과 손을 잡고 서서 앞 뒤 친구들과 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를 본다.
행복이란,
저런 표정일까?
친구들과 몸으로 놀며 숨넘어갈 듯 웃고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차가운 공기가 무색하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소풍 버스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보이질 않고 운전사는 진작에 출발했다는 답만 되풀이다.
1시간 반 동안 부모들은 떠들었다. 잠시 추위를 녹이려 바에 가서 카푸치노를 마시며 떠들었다. 한 아빠가 타고 온 전동 킥보드를 엄마들이 돌려 타며 남편들은 비디오를 찍으며 놀렸다. 몇몇 아빠들은 경비 아저씨와 소풍 버스에 붙일 안내 판을 자기들 등에 붙이며 순서대로 실어 나르자고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깔깔 웃는다. 어느 누구도 출근 시간에 발을 동동거리지 않는다. 9시가 다 되어서 버스가 도착했다. 월드컵 우승이라도 한 듯 모두 한마음으로 환호했다.
“버스가 파리에서 출발했구먼, 거기 출발이면 빨리 도착했네.” 하고 또 웃었다. “역시 여행의 백미는 로마지.” 하고 또 웃었다. 아이들이 버스에 오르고 출발하자 모두는 크게 소리쳐 인사하며 출근길에 올랐다. 회사에서 왜 늦었냐 물으면 “애 소풍 버스가 늦게 왔어.” 라고 하면 “에헤이~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나보다.
전 날엔, 아침 7시부터 유치원생 이도의 단톡 방이 계속 울렸다. 8시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채팅 창을 보니 벌써 100개가 넘는 메시지가 올라와있었다. 지난 점심에 아이가 학교에서 감자튀김을 먹은 것 같다는 거다. 학교 메뉴에는 오븐에 구운 감자인데 어. 떻. 게. 학교에서 감자튀김을 먹을 수 있냐는 거다. 것도 유치원생이!!
아이의 묘사에 의하 감자튀김인지 버터에 구운 감자인지 모호하지만 감자튀김도 버터도 무익한 음식이다. 한 엄마는 버터의 유해함에 대한 논문을 올리고 오전 8시 학교에 항의할 공문을 작성하고 엄마들과 공유했다. 세상 느려 터진 이탈리아 사람들이 감자튀김에 하나 되어 아주 신속하게 일이 진행됐다. (이탈리아의 경기는 매년 하락세에 나라 재정은 폭망 상태지만 여전히 국민건강은 세계 순위 1,2위를 다툰다.)
물론, 이 사람들도 감자튀김을 먹는다. 그러나 그것은 외식이나 여름 바닷가에서의 일이고 집, 더욱이 학교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사실 난 큰 심각성을 느끼지 못해 강 건너 불구경의 입장이었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감자튀김에 대한 논의는 식어갔다. 죄다 워킹 맘들인데 점심시간까지 감자튀김에 대해서 토론하느라 일은 했을까 모르겠다. 그 사이 난 도서관을 다녀왔고 관공서를 다녀왔고 장을 봤고 회계사에게도 들렸다.
지난 코펜하겐 여행 때 이탈리아에 살다 덴마크에 정착한 가족을 만났는데, 이탈리아에서 자란 딸이 점심시간에 당근 오이 까만 빵이 나왔다고 분노했던 것이 떠올랐다. (우리가 만난 곳이 덴마크 국립도서관이었는데) 때마침 내 옆에 앉아 있던 한 엄마가 아이를 부르더니 도시락을 열었다. 너무나 세련되고 예쁜 북유럽 풍의 도시락 통 안에 정말 수북하게 생당근 이 자~~~ 안뜩 들어있었다.
자, 이쯤 되면 덴마크의 선진화된 시스템은 음식에 대한 논의를 당근에게 유예한 채 이뤄낸 업적인가? 의문이 생긴다.
점심 저녁에 뭐 먹을까?
에 대한 논의가 사라지면,
이탈리아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며칠 전, 우체국에서의 일이다. 내 번호표는 220번 전광판엔 150번. 우체국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20명 남짓. 나머지 50명은 당최 어디에? 숨어있는 거야?
옆에 앉은 할머니의 번호는 210번이다. 얼마나 우아하게 옷을 입으셨는지 대놓고 블라우스와 카디건을 바라보았다. 눈이 침침하신지 전광판 번호가 하나 올라갈 때마다 물어보셔서 기다리는 것 밖이 할 일도 없으니 번호가 바뀔 때마다 읽어드렸다. 180번 정도 되었을 때다.
“난 늙은이지, 나이 든 사람의 말이야. 그냥 흘려들어. 내 나이 50,60 때까지도 이탈리아는 너무 좋았어. 느리고.. 따뜻했지. 그런데 지금의 로마를 봐. 엉망진창이야. 너무... 너무... 빨라. 매 시간, 매 분, 뭐가 많아. 계속 바뀌고 너무 빨라. 늙은이의 말이야. 그런데 너무 빨라. 우리 나이 든 사람들에겐 너무 힘들어. 그냥 들어. 늙은이의 말이야.”
그 빠른 게 말이죠. 그 빨라졌다는 것이 말이죠. 여전히 얼마나 느린지 아십니까? 한국은... 말이죠.... 하고 말하려다 멈추고 이탈리아도 참 많이 변했어요. 하고 답했다.
전광판은 어느 덧 200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들에게만 빠른, 세상 모두가 느리다고 하는 로마의 시간이 흐른다. 우리 눈에만 늦어 보이는 거지. 빨라야 할 것이 세상의 순위와 다른 거지.
모두가 이 것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야 라고 말하는데 이탈리아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감자튀김부터 해결하고,
여름휴가부터 정하고,
생일 파티가 더 중요하지.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여름휴가는 반년 전에 예약 완료, 생일 파티는 한 달 전 공지 완료의 나라다. 이럴 땐 참말로 신속한 일처리.)
아무리 뭐라 해도 이들이 생각하는 생의 우선순위는 흔들림이 없다. 이런 데서 자라서 급변하는 세상의 속도에 우리 애들이 적응이나 하겠어? 되묻던 어미는 이른 아침 소풍 버스를 기다리던 아이를 떠올린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행복. 학교가 즐겁다고 재미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웃는 아이는 학교 밥이 제일 맛있단다. 설레며 생일을 기다리고 두근거리며 여름을 기다린다.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도 이탈리아가 여전히 느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난공불락의 카페 강국 이탈리아에도 스타벅스가 생기는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밀라노에 이어 올해는 로마에도 문을 연다고 한다.)
그러나 부족하고 느렸던 나의 학창 시절을 뒤 돌아보았을 때, 응답하라!!!! 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그리운 것을 보면 이 아이의 이 시절의 느림이 얼마나 눈부신 시간임은 알겠다.
이탈리아야 부탁이다. 세상 모두가 느리다 손가락질해도 넌 네 갈길을 가라. 다들 그리 살고 싶은데 못 살아서 샘나서 그런 거야. 그런데 이해는 하는데, 난 한국서 살다와서 속에서 천불이 나서 말이지 종종 욕을 좀 할게.
어떤 날은 세게 할게.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