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려 했던 것 같다
참으려 했던 것 같다. 아니, 참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발견한 아이는 참을 수 없었나 보다.
후다닥, 내가 나타나자 아이의 옷을 잡아당기던 두 아이가 달아났다.
지퍼가 내려간 져지를 추켜올리며 이안이는 날 올려보며 울었다.
“치네제(중국사람) 래, 아니라고 했는데, 다시 인디아노(인도사람) 라고 ....”
한 두 번의 일이 아니지, 그러나 아이 앞에서 화를 낸 적은 한 번도 없다. 화가 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떤 의도로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알지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 단어 자체가 나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단지 한 나라의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엄마의 분노로 인해 아이가 그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를 담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화를 내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의연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가 운다. 축구 학교에서 수많은 아이들과 코치들과 부모들이 오가는 가운데 소리쳤다.
너희 둘! 이리 와!
얘는 코레아노야!
사과해! 사과하라고!!!!
울고 있잖아!!!!!!!!!!
아... 제발 나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쭈볏쭈볏 두 아이가 다가왔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보였다. 얘가 그랬어요. 난 안 그랬어요. 아이들은 서로 미뤘다.
바로 코치들과 아빠들이 다가왔다. 울고 있는 이안이의 유니폼을 가리키며 말했다.
봐,
우린 같은 팀이야.
사과해.
아이들이 사과했다.
-그래, 심지어 우리 모두는 로마(축구팀)를 응원하잖아!! 그렇지?
이안이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전 라찌오...(로마와 라찌오는 라이벌이다)
(순간 일동 침묵.......)
어쩔 줄 몰라하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빠와 코치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마도 라찌오도 모두 같지! 그럼!!
(심각한 상황인데... 웃으면 안 되는데... 그런데 이 상황이 너무 코미디다...)
코치가 아이를 달랬다.
-우리 들어가서 축구하자. 그거 알아? 2002년에 한국이 월드컵 우승했던 거? 뭐 사실은 아니지만 이탈리아를 이겼으니까 우승한 걸로 이야기해도 괜찮아. (이게 뭔 소리여...ㅋㅋㅋ) 한국 축구 잘하잖아. 유명한 선수 누구야? 말해줘.
내가 옆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박지성.
-세상에 맨체스터에서 제일 유명한 선수였잖아!!!
할렐루야, 박지성 감사합니다!!! 이 작은 축구 학교에서도 벌어지는 이런 일이 박지성은 손흥민은 어떻게 이겨내며 그런 경기를 펼친 걸까? 이 세상 모든 아시안들이 다 내 자식 같고 짠해졌다.
자, 우리 같이 들어가서 축구할까? 어느새 눈물이 멈춘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축구장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울렸던 두 아이가 앉아 있는 큰 아이들이 뛰는 잔디였다.
얘는 이안이야. 모두 함께 축구하자. 수 십 명의 아이들이 뒤엉켜 공을 차기 시작했다. 멀뚱히 서있는 아이에게 한 아이가 공을 패스했다. 공을 받은 아이가 달려 나갔다.
펜스 너머 아이를 바라보는데 참던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는 로마의 축구장 속 아이의 모습이 뿌듯했다. 그런데 이제는 저 펜스 안 세상이 너무 아린다.
그때 안토니오가 도착했다. 6살의 아이 친구를 붙잡고 하소연했다. 아까 어떤 애가 이안 이를 놀렸어. 이안이가 울었어.
이야기를 다 듣고 한숨을 쉬더니 안토니오가 말했다. 3학년 애들이죠? 몇 번 그랬어요.
멍청한 자식들.
축구장으로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이안이를 찾더니 아주, 아주 크게 소리쳤다.
“이안!!!!!!!”
공을 차던 이안이가 달려왔다. 둘은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손을 살짝 스치고 동시에 공을 향해 달려 나갔다. 곧, 크리스티안이 도착했고 프란체스코가 도착했다. 사총사다.
금세 하늘은 어두워졌고 축구장에 조명이 들어왔다. 펜스 안 세상이 밝아졌다. 날 발견한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벌써 밤이 되었어!!!”
벤치에서 테디의 아빠를 만났다. 유치원 한 반이었던 테디는 초등학교는 공립학교로 진학했다. 테디의 아빠는 미국인이다. 유치원 내내 같은 외국인 부모로 공감해주고 응원해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이탈리아 말이 모국어고 자신들을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얼굴색이 다르고 머리카락 색이 다르니 이들에겐(이탈리아 사람들) 언제나 외국인일 거야. 그래도 이안이의 학교는 친절하고 부드럽지. 공립학교는 좀 더 거칠어.
-알아, 고맙게도 이제 아이의 학교 안에선 이런 일은 없지. 모두가 이안이를 잘 알아. 하지만 그런 세상만 있는 게 아니잖아. 특히 남자아이들의 세상은 더 강하고 이런 스포츠를 하는 곳은 더 거칠고, 알아, 알지. 어떻게 부드러운 세상 속에만 아이를 둘 수 있겠어? 다만 지켜보는 게 쉽지 않네.
옆자리엔 안토니오의 아빠 크리스티안의 아빠 프란체스코의 할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무조건 우리 애들에게 이야기하라고 해. 함께 싸워 줄 거야. 사총사잖아. 학교에서도 놀다가 큰 학년애들이랑 다투게되면 다 같이 도와준다고 했어.
축구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와 이야기를 나눴다.
-왜 울었어? 한 번도 그런 이야기에 운 적 없잖아.
-안 울려고 한 거야. 그런데 이번엔 울어버렸어.
-한국사람이라고 말하지 그랬어.
-치네제라고 해서 아니라고 했어. 그랬더니 인디아 노래. 아니라고 코레아노라고 하니까 그냥 다 똑같데.
-무식하다고 그래.
-무슨 말을 해도 계속 다른 말을 할 거야.
-그럼, 그냥 한국말해.
-응?
-어차피 모를 텐데 그냥 한국말해. 음, 그래!! 똥 멍청이야 방귀나 뀌어!!!!
-큭큭큭 방귀나 뀌어!!!!
똥 멍청이야 방귀나 뀌어!!!!
로마 밤하늘 아래에서 우린 소리쳤다.
똥 멍청이야!!
방귀나 뀌어!!!!
-안토니오랑 크리스티안, 프란체스코한테 말해. 안토니오한테 말하니까 멍청한 자식들이라고 했어.
-그래?
-너도 다른 애들이 네 친구들을 놀리면 같이 싸워줄 거잖아.
-응.
-네 친구들도 같이 싸워준데.
-알겠어.
-그런데 이안이가 다르게 생긴 건 알지? 너가 한국에서 사는데 이탈리아 애가 있으면 한국애들도 그 애에게 다르게 생겼다고 생각할 거고 물어볼 거야.
-그런데 그러면 어디에서 왔냐고 어디에 사냐고 물어보면 될 텐데,
-그러게. 그냥 이안이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해주면 돼. 그래도 나쁘게 하면 친구들에게 코치에게 선생님에게 말하자.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며 아빠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안 울려고 했는데 울었어.
-울어도 돼.
-나보다 큰 애들이었어.
-중요한 건 나쁜 애들이라는 거야.
-나쁜 건 중요하지 않잖아.
-아니, 큰 건 상관없다고 그냥 그 애들이 나쁜 애들이라는 거야.
-맞아. 이도가 2살인데 12살이 놀리면 안 돼. 이도가 2살인데 12살이 때리면 어떻게 되겠어? 엄마가 혼냈어. 그리고 똥 멍청이 방귀나 뀌어라고 말하라고 했어.
똥 멍청이 방귀나 뀌어, 이건 너와 나의 주문.
아이의 마음가짐, 자존감을 지키는 법, 분노하지 않고 상대에게 응하는 말, 상대방을 이해하게 하고 이해해주려는 노력,
중요하지. 중. 요. 하. 지. 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우리를 웃게 하는 주문,
그리고
멍청한 자식들이라고 욕해주는 내편.
꼭 강해져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혼자 싸워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울어도 되고 도와달라고 말해도 되며 욕해도 되고 일러바쳐도 된다는 것
손 내 밀면 내 마음처럼 화내고 싸워주는 이가 있다는 믿음 짓궂은 이가 아닌 친절한 이들이 우리와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마음 아픈 일보다 즐거운 일들이 더 많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
의연하게 받아들이자. 모르니 그럴 수 있다.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속상하고 화나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 날 외국에서 육아를 하는 친구들을 만나 하소연하고 욕도 했다.
그때 한 친구가 말했다.
-나도 해외생활을 오래 했지만 그렇게 말해 준 친구는 없었어. 멍청다고 욕해주고 같이 안타까워해주는 현지인 말이야. 네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은 거야. 그건 복이야.
결국 이 일로 우리가 실감하게 된 것은 우리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 이웃과 살아가고 있는가’ 였다.
written by iand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