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 마르케
모험의 날이 밝았다. 2주간의 캠핑카 여행을 위해 이민가방까지 동원되었다. 2주를 살기 위해 우리가 평소 이 만큼의 물건이 필요했던가. 참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구나. 그나마 덜어낸 것이 이 정도. 많이도 이고 지고 매일을 살고 있구나.
캠핑카를 받는 장소에 도착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나의 가장 큰 걱정은 여행 중 발생할 고생이 아니라 캠핑카 준비가 안되었으면 어쩌나 였다. 그렇다. 나는 이탈리아를 참으로 사랑하지만 그에 비해 신뢰는 얕다. 모든 변수를 계산하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예상치 못한 어딘가에서 역경이 뾰족하게 삐져나오는 것이 이 나라임을 15년을 살면서 끊임없이 확인했다. 나의 우려를 들은 남편의 얼굴에 황당함이 비쳤다. 그는 나와 10년을 넘게 살면서 없는 걱정도 만들어 내는 놀라운 능력에 매번 감탄한다. 이렇게 걱정이 많은데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사람이 되어 나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여하튼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캠핑카는 무사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눌한 인상의 이탈리아 직원이 느릿느릿 캠핑카 사용에 대해 설명했다. 보험 약관 설명까지 이어지자 우리 부부는 행여 하나라도 놓칠까 집중했다. 직원의 늘어지는 속도의 말 덕분에 다행히 알아듣기가 어렵진 않았다. 그럼에도 낯선 캠핑카 조작 방법을 듣고 있자니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 잘할 수 있을까? 아니, 할 수 있을까?
코로나를 겪으며 우린 많은 처음을 겪었다. 처음이 마냥 설레는 건 몇 살 까지 일까? 적어도 30대 말에 만나는 처음은 단 1의 설렘도 없었다. 일 년 동안 몰아치듯 겪은 처음들이 너무나 부대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팬데믹 시대에 결코 피할 수 없는, 아니, 피해선 안 되는 처음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인정하고 적응해야만 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고 말들 하지만 애당초 즐길 수 있었다면 피하고 싶은 마음이 왜 생기겠나. 그래도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생각을 전환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를 겪으며 맞이하는 처음 앞에 망설임이 일렁일 땐 이렇게 되뇌었다.
이 것을 처음부터 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탁월하게 해내는 사람이 대단해 보이는 건 당연해. 하지만 그 사람은 단지 나보다 먼저 이 일을 해 본 사람일 뿐이야. 그와 나의 차이는 단 하나, 경험뿐이야.
그 누구도 캠핑카를 직접 타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거야. 모를 때만 두려운 거야. 알면 별 것 아니야. 알려면, 해보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어. 떠올려봐. 일 년 전 처음이라 힘들었던 일들을. 그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세세하게 생각 안나지? 불과 일 년만 지나도 지금의 처음은 떠오르지 않아. 그냥 그 순간에만 어려운 거야.
그러나 아무리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캠핑장에 갇힌다던가, 가스버너가 순간적으로 화염에 싸이기도 하고, 휴대폰이 바다에 빠지고, 캠핑카가 다닐 수 없는 막다른 산 길을 만나는 등 고난들은 불시에,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그럴 때면 캠핑카로 여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보았다. 예외 없이 모두 평범해 보였다. 그 사실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도전 자체는 경이로워 보이는데 이를 행하는 이의 외관이 평범할 때 오는 안도와 용기가 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특별해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듣기만 할 땐 복잡할 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별 것 아닙니다. “ 살면서 수도 없이 들은 말을 떠올렸다. 삶은 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 깨달았다. 내 경험이 아닌 타인의 입으로 듣기만 한 경험은 과장되기 마련이다.
부부는 아이가 생겨 가족을 이루면서 어느 순간부터 낯설 곳, 불편한 곳으로의 여행을 지양하게 되었다.
아무런 정보나 예약 없이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결정해 떠났던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던가.
여행이 아닌 모험을 떠난 마지막은 언제였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코로나 시대에 내일을 알 수 없음은 절정의 불안과 두려움을 상징했다.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이 일상에서 하루빨리 사라지길 기도했다.
그랬던 우리가 캠핑카를 타고 달리며 낯선 내일 앞에 설렘으로 빛났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렌트한 캠핑카 모델명이 노매드다. 유목하듯 살기엔 채워버린 삶의 물건들이 너무나 많지만 이 15일 만큼은 유목민 가족이 되어본다.
첫 일정은 로마에서 남쪽으로 차를 타고 7시간을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밤늦게 목적지에 도착할 것 같다. 캠핑카 운전도 익숙하지 않고 목적지도 생소한 곳인데 도착 시간이 너무 애매하다. 캠핑장이 문을 닫는 시간에 도착이 가능할지 불안하다. 그런데 출발 전날 아침 인스타그램 DM으로 낯선 이의 메시지를 받았다. 로마 동쪽 끝에 위치한 마르케 주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 남편과 결혼했고 어린 아들이 있었다. 일면식도 없고 대화를 주고받은 적도 없는 사이다.
망설이다 용기 내어 연락합니다. 이번 여행 일정에 가능하다면 우리 동네에 들렀다 가세요. 집 근처에 유명한 캠핑장도 있어요.
그녀가 사는 동네는 로마에서 차로 3시간.
우린 즉흥적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그들이 사는 바닷가 마을로 목적지를 수정했다. 멋대로 일정을 바꾸는 것이 캠핑카 여행의 묘미 아니겠는가. 캠핑장은 길게 이어지는 해변가 허허벌판에 위치해 있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캠핑장엔 작은 개수대와 비닐 막이가 있는 노천 샤워실만 덩그러니 있었다. 그 덕분에 캠핑 특유의 날 것의 느낌이 깊게 풍겼다. 여행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이런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캠핑장을 만났다면 난색을 표했겠지만 여행 첫날에 더없이 어울리는 부족함이었다.
후에 우린 깨닫게 된다. 애초에 계획했던 목적지가 어머어마하게 험준한 산길을 지나야 도착할 수 있었음을. 만약 일정을 수정하지 않았더라면 산속에서 생고생을 하고 진작에 캠핑카 여행에 질려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이 살지 않는 작은 해안가 마을의, 한국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으로 보낸 낯선 이의 초대가 우리가 모험을 후회하지 않도록 멋지게 방향을 틀어주었던 것이다.
캠핑장에 도착하고 얼마지 않아 저 멀리 캠핑장 입구에 누군가 폴짝폴짝 뛰면서 소리를 지르며 오고 있었다. 메시지의 주인공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 도시 안에 한국인은 그녀와 우리 가족뿐일 테니. 이탈리아에서 이방인이라는 것이 때로는 지독히 쓸쓸해도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 외롭지만은 않다. 그녀의 가족이 두 손 가득 포장해온 해산물이 잔뜩 들어간 버거 덕분에 든든하게 캠핑 여행의 첫 날밤을 맞이했다.
예측불허의 내일이 기다려졌다.
여행 내내 매 순간 처음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설렜다.
불안은 어느새 두근거림으로 바뀌었다.
written by iandos
*마르케 주 Sant'Elpidio a Mare, Fermo
*캠핑장 : (무인 캠핑장 입니다) Camper Parking Area
- Beachfront Parking - Porto Sant'Elpidio
+39 370 134 5541
https://goo.gl/maps/AHDHbGTCyJdAcKzm6
저녁 7시 도착 다음 날 새벽 6시 출발 캠핑장 비용 €5.00
길건너 바로 Sant'Elpidio 해변
*로마에서 차로 세시간 *화장실 따로 없음
[캠핑카타고 이탈리아 15박 16일] ep.1